白磁雲龍文透刻硯滴 높이 12.3cm
2014년12월17일 서울옥션 제134회 미술품경매 No.271, 유찰
조선시대 용은 말할 것도 없이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 단연 왕의 상징물로서 왕이 입는 옷은 곤룡포였고 왕이 앉는 의자는 용상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백자에 그려진 용 문양 역시 궁중에서 왕과 관련된 행사용에만 쓰였다.
그러다가 19세기 세도정치의 등장과 함께 왕가의 엄격한 위계질서가 완화되면서 사대부 집안에서도 용준(龍尊)을 가져다쓰게 됐다. 그렇기는 해도 뒷머리가 땡기는 것 같은 불안이 있어 발톱수를 줄여 썼다.
백자청화 투각운룡문 연적, 높이 11.5cm 국립중앙박물관 박병래기증
연적의 전성시대는 사대부 집안에서 용준을 쓴 시기와 다르지 않다. 그래서 연적에도 가끔씩 용문양이 등장한다. 사각 연적에 청화로 용을 그린 것도 있고 한 걸음 더 나아간 투각 기법을 써서 용을 새긴 것도 있다. 투각 용문양 연적은 용의 상징성에 더해 고수준의 투각기법이 쓰였다는 점에서 일반 연적보다 랭크가 하나 위로 대접을 받는다.
백자청화 투각운룡문 원형연적, 지름14.9cm 오사카동양도자미술관
국립중앙박물관에 청화로 용에 장식을 더한 연적이 있으며 일본의 오사카동양도자미술관에 원통형처럼 생긴 외형에 윗면에는 태극을 청화로 그리고 옆면에 돌아가면서 용을 새긴 일급 연적이 전한다.
이 연적은 청화와 진사를 일체 쓰지 않았다. 밥주발을 엎어 놓은 듯한 형상에 용을 투각으로 새겼다. 용의 얼굴이 전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도록 커다랗게 클로즈업해 놓았다. 그리고 용의 몸체는 여의문 같이 보이는 구름으로 군데군데 받치고 그 아래에 뇌문(雷文)을 돌렸다. 뇌문은 달리 회문(回文)이라고도 한다.(중국에서는 회문을 옆으로 계속 이어지는 만자문과 같은 것으로 보기도 한다)
뇌문이든 회문이든 양근 분원에서 이를 새긴 사람은 누구였는가. 조선시대 분원에는 500명 전후의 사기장이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경국대전』을 보면 원래 정원은 380명 체제였는데 일이 늘면서 이렇게 됐다. 그 중에서 백업 인력, 즉 흙과 땔나무 운반과 자기 수송과 같은 단순노동자에 종사하는 사람이 75%이상을 차지했다. 그리고 5%는 행정관리자고 나머지 20% 내외가 오늘날 도공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기장이다.(조선시대 말기의 기록에는 이들 프런트와 백을 합쳐 장졸(匠卒)이라고 불렀다)
당연히 백자 만드는 일은 분업체제로 이뤄졌는데 변수(邊首)라는 대장 아래 14가지 일로 전문화됐다. 예를 들어 그릇 모양을 만드는 장인은 조기장(造器匠, 우리말로는 사발대정)이라고 했고 불을 관리하는 사람은 화장(火匠, 불대정)이라고 했다. 형상을 빗은 뒤 가마에 넣기 전에 말리는 일만을 전담하는 사람은 건화장(建火匠)이라고 했다. 물론 청화로 문양을 그려넣는 화청장(畵靑匠)도 별도로 있었다.
그런데 변수와 조기장 다음으로 중시된 장인으로 마조장(磨造匠)이 있다. 한일합병 직후에 조선에 건너와 분원의 전통작업 모습을 지켜봤던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의 기록에 따르면 마조장은 굽 대정으로 불리며 그릇모양을 손질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이 내용만으로는 마조장이 투각을 새겼는지 여부는 불분명하다.
그렇지만 목기나 유기를 다루는 쪽에서도 속을 파내는 사람을 마조장이라고 부른 사례가 보고된 적이 있다. 양근 분원의 마조장 역시 조기장이 물레를 돌려 형상을 만들면 그가 칼을 들고 굽을 전문적으로 파냈고 한다. 따라서 굽을 파내는 한편으로 이처럼 투각 장식도 그가 전담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분원과 사기장의 마지막 이야기를 쓴 박은숙 씨에 따르면 이 백자운용문투각연적이 만들어졌을 무렵과 그다지 멀지 않는 1883년에 분원에는 10명의 마조장이 일하고 있었다고 한다.
청화를 바르지 않아 담백하게 보이는 위에 천연스럽게 점박이 용을 나타낸 장식에서 한층 조선다운 맛이 느껴지는 연적이다(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