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磁靑華家形硯滴 7.7x7.5x8.2(h)cm
2014년12월17일 서울옥션 제134회미술품경매 No.269, 4000만원 낙찰
조선후기 들어 문인들의 자그마한 호사(豪奢) 취향에서 시작된 연적은 이토 이쿠타로(伊藤郁太郞) 前오사카동양도자미술관 관장이 지적한 것처럼 상상 이상으로 그 종류가 다양하다. 기법은 제쳐두고 형태로만 보더라도 사각, 팔각, 원형, 부채꼴과 같은 다양한 기하학적 형태가 있다.
그 외에 분청사기의 자라병 모습을 한 것에서 꽃잎형, 가락지형, 무릎형, 복숭아형 등이 있다.
또 동물 모습을 본 뜬 것으로 거북, 해태, 용, 나비, 물고기, 참새, 닭, 개구리 등의 연적도 있다. 동물은 아니지만 19세기 후반 이후에는 금강산 모습을 한 연적도 만들어졌다.
연적에 보이는 이런 버라이어티에 대해 따로 언급한 전문가는 보이지 않지만 방병선 교수는 호화로운 도자기 제작이 당시의 사치풍조, 골동 취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특히 부유한 상인과 중인계층에서 골동과 서화수장에 열을 올리게 되면서 도자기에서도 ‘호사스럽고 화려한 장식의 것을 찾게 됐다’고 말하고 있다.(『왕조실록을 통해 본 조선도자사』고려대학교출판부)
백자청화 집형연적, 높이 8.3cm 국립중앙박물관
19세기 후반에 보인 이런 다양한 연적세계에서 단연 발군의 것을 꼽는다면 이 집형 연적을 빼놓을 수 없다. 연적은 사각, 팔각에서 물고기, 해태까지 다양하게 만들어졌지만 이들이 장식이나 문양의 소재로 쓰인 역사를 보면 꽤 오래된 전통적인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나마 신선하다고 여겨지는 것인 금강산 연적라고 하지만 이는 당시의 유행한 금강산 여행 붐과 관련이 깊다. 그런 점에서 누구의 솜씨로부터 시작됐는지 알 수 없으나 집형 연적은 시대가 요구하는 참신함과 새로움은 그리고 발상의 독특함이 담긴 일품이라고 할 수 있다.
동양미술에서 집에 대해서는 따로 어떤 상징성이 부여된 적은 없다. 동양미술의 상징체계를 집대성한 노자키 세이킨(野崎誠近)의 『중국길상도안』을 펼쳐보아도 집에 대한 설명은 없다.
백자청화 집형연적, 미국 메트로폴리탄미술관
1850년대를 전후해 분원의 어느 한 도공의 머리에서 갑자기 기발한 아이디어가 솟아나왔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그가 만든 이 집 형태의 연적은 뜻밖의 외형으로 만든 직후부터 대단한 인기를 끈 듯하다. 간발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한 사람의 머리와 손끝에서 나온 듯한 유사함을 보이는 연적이 여럿 있다.
이들과 공통적으로 이 연적도 기와 골과 네 개의 기둥에 청화를 짙게 발랐다. 각 벽에는 정교하게 창살을 그린 창을 냈다. 또 정자를 염두에 만든 것처럼 난간이 그려졌다.(일부는 이 난간이 없는 것도 있다. 또 창문이 방문처럼 그려진 것도 있다) 그리고 굽은 탑의 기단부처럼 만들면서 마치 집의 마루 밑이 트여있는 것처럼 통풍창을 냈다. 굽은 모래를 깔아 구은 흔적이 있다.
백자청화 집형연적의 측면과 밑부분
집형 연적은 어떤 발상에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없다. 하지만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조선후기의 문화적 분위기가 이를 탄생시킨 모태라고는 짐작해볼 수 있다. 그 결과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별격(別格)의 연적 세계를 하나 더 추가하게 됐다고 말할 수 있다.(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