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磁指環文透刻四角硯滴 9.6x9.6x8(h)cm
2009년3월26일 서울옥션 제113회미술품경매 No.31, 7500만원 낙찰
18세기 후반 들어 백자 문방구에 첫 선을 보인 투각기법이 한층 정교해지면서 연적에도 적용된 사례이다. 투각은 말할 것도 없이 손이 많이 가는 기술이다. 거기에 태토의 수축률을 미리 잘 예측해 놓지 않으면 주저앉거나 터져서 망쳐버리게 된다. 그래서 특별 주문이나 의뢰가 아니고서는 장인 쪽에서 먼저 하겠다고 손을 들기 힘든 기술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19세기가 들어 필통은 물론 연적과 같은 문방구에 특히 이 기법이 자주 쓰인 게 보인다. 이런 사정을 고려하면 이 시대에 별도 내지는 특별한 주문이 문방구 쪽에 몰렸다고 해석된다. 어느 면에서는 폭주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런 표현이 과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는데 그것은 중국이나 일본의 도자 책을 보면 금방 느끼게 된다. 이들 책에는 병, 항아리, 접시가 대부분이다. 일본 쇼가쿠칸(小學館)에서 낸 유명한 『세계도자전집』의 중국이나 일본 편을 보아도 문방구는 거의 소개돼 있지 않다.
그런 반면 조선시대의 백자를 다룬 책에는 어느 책이든 후기로 가면 갈수록 별도의 챕터로 분류해야할 정도로 문방구류가 넘쳐난다. 중국에서는 이미 명 후반부터 문인문화가 시민사회로 확산되면서 문방구들이 다수 제작됐다. 그런데 중국의 문방구류는 중국도자사 전체로 보면 비중이 조선에 비해 그리 크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조선에서는 달랐다. 18세기 후반 이후 백자 문방구 주문의 폭주는 이 무렵부터 문인, 사대부 사회에 취미, 취향의 세계가 새롭게 열린 것과 관계가 깊다. 당시 연경 사신으로 다녀온 사람들의 자랑거리 중 하나가 연경의 골동거리 구경이었다.
유리창(琉璃廠) 앞 10여리와 용봉사(龍鳳寺) 앞의 시장은 특히 유명했는데 박제가 역시 여기를 둘러보고 글을 한 편 썼다. 그는 ‘민생에 무관하다고 해서 어둡고 미련하게 그런 것을 좋아할 줄 모른다면 그 사람이 어떻게 되겠는가’라면서 이른바 골동옹호론을 폈다. 또 그는 골동을 옷도 아니고 먹을 것도 아니지만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청산(靑山)과 백운(白雲)에 비유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18세기말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조선 문인들 사이에서도 취미와 취향의 시대가 열렸고 또 그에 따라 이들의 취향을 반영한 소박한 사치생활 거리로 백자 문방구가 다수 주문된 것이다.
이 백자 가락지문 투각연적은 그와 같은 시대적 취향을 등에 업고 특주(特注)된 것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특주라는 말을 쓴 것은 이 연적에 담긴 빼어난 기술과 솜씨가 그것을 말해준다.
넓적한 포도 잎 문양이 아니라 반지처럼 동그란 문양을 사방에서 파냈다. 측면은 일률적으로 8개의 반지를 새겼다. 윗면은 두 배인 16개를 넣었다. 그리고 벼루에 먹물을 따르는 연적은 그 안쪽에 감 모양 형태로 만들어 넣었다. 만들어 넣었다고 했지만 안쪽의 감모양의 작은 연적을 먼저이다.
이 작은 연적은 10장의 감잎 위에 올려놓은 형태인데 그 위에 사방을 반지문양으로 투각한 겉틀을 씌웠다. 말하자면 두 개의 조형물을 하나로 합쳐 구운 것이다. 제작 과정의 난이도를 고려하면 숙련된 솜씨에 정교한 손의 기교가 십분 상상이 가는 연적이다.
모서리 부분만 살려서 만든 굽에는 전성기 분원가마의 방식대로 모래를 발라 구은 흔적이 남아있다. 가운데 모래가 엉겨 붙은 흔적은 감 형태의 연적이 놓인 자리가 자체 무게로 살짝 주져 않은 때문에 생긴 것이다.(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