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磁靑華辰砂彩葡萄文透刻細筆筒 높이 10cm
2007년3월9일 서울옥션 제105회미술품경매 No.116, 4억5000만원 낙찰
늘씬한 키에 눈길이 절로 가는 필통이다. 조선시대 필통의 비례는 1대 1.2 전후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큰 키 보다는 듬직하고 안정된 느낌을 우선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런 가운데 이 필통은 1대 1.5의 비율을 훌쩍 넘는다.
거기에 마치 대나무 마디처럼 가운데를 홀쭉하게 후려 수려한 인상을 더해주고 있다. 이렇게 위로 길쭉한 형태의 필통을 흔히 시장에서는 세필통(細筆筒)이라며 달리 부른다. 또 이런 세필통을 가리켜 흔히 규방(閨房)용이라고 보는 경향도 있다.
이 필통은 태토의 색이 매우 뛰어나다. 푸른빛이 살짝 돌면서 전체적으로 맑고 깨끗한 분위기여서 품격을 끌어올리고 있다. 거기에 투각, 청화, 진사 등 조선백자에 가할 수 있는 모든 장식 요소를 총동원했다.
투각은 태토의 질이 좋지 않으면 주저앉아 쉽게 시도될 수 없는 기술이다. 그럼에도 투각이 시도되는 것은 이차원적 평면을 단숨에 삼차원의 입체세계로 끌고 가는 매력 때문이다. 거기에 청화와 진사를 동시에 구사했다.
청화는 18세기 들어 다양하게 활용됐으나 진사는 다르다. 조선 전기에 진사가 사용된 경우가 거의 없다. 후기에 들어서도 간간히 제작되다 19세기 들어서 비로소 사례를 비교할 정도의 수자까지 만들어지게 됐다.
청화와 달리 거의 제작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분명히 밝혀진 바는 없다. 방병선 교수는 ‘선명치 못한 색상과 붉은 색에 대한 반감’이 이유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태조실록』에 진상 자기에 붉은 색의 사용을 금하는 내용이 있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백자-순백으로 빗어낸 조선의 마음』 돌베개)
방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진사, 즉 산화동(酸化銅)을 다루는 데는 제약이 있었다. 이는 비교적 안정적인 청화안료와 달리 휘발성이 강하고 불안정했다. 진사를 써서 원했던 당초의 색은 진홍의 붉은 색이다. 하지만 가마 속 불의 조건에 따라 날아가 버리면 밤색이나 적갈색이 된다. 또 어떤 경우에는 검붉은 색이 되거나 아예 산회돼서 초록색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 투각 필통에는 청화와 함께 진사가 함께 구사돼 포도나무 줄기와 잎사귀에는 청화를 칠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보이는 포도 알에는 하나한 모두 진사를 발라 검푸른 포도 빛은 아니지만 와인색에 가까운 포도를 연출하는데 성공했다.
크기는 얼마 크지 않으나 훤칠한 비례감, 입체 조각적인 투각 솜씨 또 회화적 감각이 물씬 색깔 구사 등을 보면 이 필토에 19세기 광주분원리 관요의 절정기 솜씨를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말할 수 있다.(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