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磁靑華詩文筆筒 높이 20cm
2010년5월6일 서울옥션 제113회미술품경매 No.78 1억1300만원 낙찰
키가 큰 흰 백자에 시문만 적힌 필통이다. 도자기에 시문을 적어 감상하는 운치 있는 일은 고려 상감청자 시절부터 있었다. 또 청화가 귀하디귀한 조선전기 즉 15세기에도 청화로 시를 쓴 청화백자 접시가 만들어진 적이 있다.
이 필통은 18세기 분원제작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시를 보면 그 연대를 더 올려 잡아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일반적으로 청화 백자에 시구가 적히기 시작하는 것은 19세기 들어서부터이다. 이때에 적힌 시구는 대개 당나라나 송나라의 이름난 시인의 유명 시였다.
그런데 여기의 시는 다르다. 조선 문인이 지은 시가 적혀 있다. 보이는 면의 시 구절은 ‘이섭지묵 이시비천 백여기동(一涉紙墨 而是非千 百與其動)’이다. 종이 지(紙)자는 고자(古字)를 썼다. 이것만으로는 뜻이 잘 통하지 않는데 이는 조선후기 숙종 때 문장으로 이름을 떨친 농암 김창협(農巖 金昌協 1651-1708)이 지은 시의 일부이다.
농암은 애초부터 도자기 대상으로 이 시를 지었다. 어떻게 지었는가 하는 연유는 그의 문집 『농암집』에 소상히 나와 있다. 그는 49살 되던 1699년 6월에 경기도 광주로 갔다. 십년 전에 돌아가신 부친의 묘지석을 굽기 위한 일 때문이었다. 이때 작업하는 틈틈이 도공들에게 말해서 도자기 몇 가지를 굽게 했다. 그리고 도자기마다 글을 하나씩 지어 옛 사람들도 말한, 기물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을 경계하고자 했다.(己卯夏 爲燔先誌 往廣州窯所間 命工人作數種器皿 因各爲之銘 以寓古人儆戒之意)
당시 만들게 한 도자기는 밥그릇, 술 단지, 세수 대야, 등잔, 필통, 연적 등 여섯 가지였다. 백자 필통의 시는 이때 지은 필통에 대한 시이다. 『농암집』에 실린 원문와 달리 글자 몇 개가 빠져 있다.
匣而不用 넣어 두고 사용하지 않으면
死毫枯竹 죽은 털에 바싹 마른 대나무 자루일 뿐
一涉紙墨而是非千百 그러나 지묵이 한번 어우러지면 천백 가지 시비를 빚어내거니
嗚呼與其動而有失 아, 움직여서 잘못이 있기보다는
無寧深藏乎爾室 네 집에 깊이 숨어있는 게 낫지 않을까 (한국고전번역원 『농암집』인용)
농암은 전형적인 노론선비이다. 주자학적 가치를 신봉하는 유학자로서 자신이 비록 도자기를 굽게 하기는 했지만 외부 사물에 마음을 빼앗겨 뜻을 잃어버리는 완물상지(玩物喪志)는 늘 경계하고 있다고 이를 지은 것이다.
그림이든 글이든 도자기에 적어 넣는 일은 쉽지 않다. 초벌구이는 수분이 극도로 말라 있어 붓의 속도가 빨라야하고 또 도자기 위의 붓 움직임에 익숙해야 한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 농암이 이를 직접 썼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농암이 지은 운치 있는 시를 쓴 청화백자 문방구는 이외에도 몇몇 사례가 전한다. 이를 보면 농암이 직접 썼거나 혹은 옆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시구를 적었다고 보기 힘들다. 오히려 당대의 유명학자인 농암의 시구를 적어 넣음으로서 운치에 더해, 농암의 문격(文格)을 빌리려 했다고 해석하는 쪽이 나을 것이다.
이는 보는 사람의 해석마다 다르겠지만 농암 시가 분명한 이상 이 필통의 이름은 밋밋한 ‘시문’ 운운 보다는 ‘백자청화 농암시문 필통’으로 해야 훨씬 격에 어울리게 된다.(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