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磁葡萄文透刻筆筒 높이 13.8cm
2009년3월26일 서울옥션 제113회미술품경매 No.32, 600만원 낙찰
카스피해와 코카사스 일대가 원산지인 포도가 동양에 전해진 것은 한나라 때인 기원전 2세기라고 한다. 그리고 당나라 들어 중앙아시아산 포도주가 장안에 전해지며 이백과 같은 시인처럼 묵객들이 포도주에 취해 시를 읊는 게 유행했다.
중국 대륙의 이런 사정을 보면 포도가 한반도에 전해진 것도 그리 늦어 보이지 않는다. 포도는 그림도 그렇지만 도자기와도 인연이 깊다. 고려청자에 자주 문양으로 등장한다. 포도와 동자를 함께 새겨 넣는 것은 고려 상감청자 중에서 최고로 손꼽혔다.
청자상감 포도동자문 동채 주전자, 높이 36.1cm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신인 제실박물관 시절을 대표하는 유물 중 하나가 청자상감 포도동자문 동채 주전자이다. 이는 제실박물관이 첫 번째로 구입한 것이기도 한데 호리병처럼 생긴 병에 당시 금보다 비쌌다는 진사(酸化銅) 안료로 붉은 포도송이를 그렸다. 또 그 주변에 덩굴을 쥐고 있는 귀여운 아이들을 백상감으로 새겼다. 당시 구입가격은 990원. 이는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10억원 쯤 된다고 한다.
백자청화 포도문 접시, 15세기 지름 22cm 일본 개인
아무튼 포도문양은 13세기부터 벌써 한국의 도자기에 쓰였다. 조선에도 그와 같은 전통이 그대로 계승됐다. 조선 백자에 이미 15세기부터 포도 문양이 도자기에 들어갔다. 이 무렵에 만든 청화백자 접시에 탐스러운 포도송이를 그린 것이 있다.
이후로 항아리, 병 등에 다양하게 포도문양이 쓰이다가 19세기 들어 문방구에까지 들어왔다. 이 백자필통은 색을 전혀 넣지 않고 조각으로만 문양을 넣었는데 그 주제가 포도이다. 19세기라고 하면 청화의 시대라고 할 만큼 분원백자는 청화일색이었다.
그런데 의연하게 색을 빼버리고 포도덩굴에 포도 알 그리고 위아래의 선과 빗살문까지 모두 조각으로만 처리했다. 그 결과 변화무쌍한 포도 덩굴과 포도송이의 묘사에도 불구하고 심플하고 깨끗하면서도 어딘가 절제된 인상을 전해준다.
절제라는 단어로 인해 당시 검약과 자기수양을 미덕으로 삼은 도학적인 문인을 떠올릴 수도 있다. 그런데 포도 문양의 상징은 누가 뭐라 해도 다산(多産)이다. 애를 많이 낳게 해달라는 주술적인 상징과 문인의 정신 자세와는 매칭이 잘 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다르게 생각하면 어떨까. 18세기 후반 들어서부터 조선에는 여성들의 독서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남성독서층의 확산이 여성들에게까지 전해진 것인데 정조시대의 정승으로 유명했던 채제공(1720-1799)은 부녀자들 사이에 독서열기가 일어 ‘비녀, 팔찌는 물론 빗을 내면서까지 책을 빌려다 보고 있다’고 한탄하는 글을 쓴 적도 있다.
채제공의 글은 자기 부인이 쓴 책의 서문에 쓴 내용의 일부이다. 이를 보면 이 시대에 책보는 규수를 넘어 붓을 잡고 글을 쓰는 부인네도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겸양과 절제를 미덕으로 한 선비문화의 상징인가 아니면 글 읽는 여인들의 문갑 위를 장식한 포도문양 백자필통이었는가의 문제는 전적으로 감상하는 이의 상상의 세계가 어디로 뻗어가는지에 달렸다고 할 수 있다.(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