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磁靑華芭蕉水四角楪匙 사방 14.7x14.6cm
2008년12월16일 서울옥션 제112회 미술품경매 No.44번 2000만원 낙찰
조선시대 분원에 한양에서 도화서 화원들이 내려가 그림을 그렸다고 하는 기록은 일찍부터 있었다. 그래서 18세기 후반의 훤칠하게 키가 큰 항아리에 그려진 연꽃을 가리켜 김홍도의 솜씨라고도 한다.
그런데 19세기가 들면 도화서 화원의 솜씨라고 보기에는 좀 애매한 그림도 보인다. 민화풍이 물씬한 문양이다. 그래서 일부 연구자들은 19세기 중반 이후에 청화백자에 보이는 그림에 대해 민화와의 연관성을 지적하기도 한다. 하지만 민화의 익명성으로 인해 그 실상이 아직까지 분명하게 밝혀지지는 않았다.
이 사각 접시에 그려진 문양은 옆에서 괴석과 파초라고 귀 뜸 해주기 전까지는 알쏭달쏭하게 보일 정도로 특이하다. 정통파 화가의 수법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 한 폭의 반추상화처럼 보인다는 게 솔직한 말일 것이다.
백자에 괴석이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청화 백자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는 18세기 이후부터이다. 조선 전기 즉 15세기에 만들어진 청화백자에서는 괴석이 그려진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18세기가 되면 초화문(草花文)에서 조차 들풀만 덩그러니 나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 반드시 곁에 괴석이 곁들여진다.
그러면 파초 문양은 어떤가. 파초 역시 18세기부터 도자기 속으로 들어와 시원스럽게 그려졌다. 괴석과 파초는 세트가 되어 18세기 그림에 자주 보인다. 겸재 정선(鄭敾 1676-1759)의 그림에도 보인다.
[참고] 정선 횡거좌정, 왜관수도원 소장
그런 점에서 사각 접시에 그려진 파초와 괴석 역시 모두 앞선 시대의 전통을 따랐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필법이 완전히 바뀌었다. 울퉁불퉁한 괴석은 19세기 중반 괴석그림의 명수 정학교(丁學敎 1832-1914)가 등장하면서 바뀌었다. 위로 치솟아 뾰쪽하거나 또 기이하게도 벽돌을 쌓은 듯이 네모나고 각진 형태 같은 것도 등장했다. 이 접시는 아무래도 그 영향을 어느 정도 받은 것처럼 보인다.
[참고] 정학교 죽석도, 고려대박물관 소장
물론 다른 해석도 있다 네모난 기둥 속에 규칙적인 빗금과 곡선이 반복돼는 것을 보면 괴석보다는 칠보문의 변형이 아닌가 하는 지적이다. 어느 쪽인지 단정할 수 없으나 전체의 인상이 민화쪽 필치로 기우는 것만은 사실이다.
필치는 그렇지만 도자기 자체는 특급이라고 할 만큼 뛰어나다. 19세기 분원절정기의 백토와 유약 그리고 청화가 쓰였다. 또 형태도 밋밋한 사각으로 그친 게 아니라 여러 번 주름을 잡아 전체를 꽃잎처럼 보이도록 마무리했다.
화려하게 꾸민 사각의 형태 위에 과감하게 그린 민화풍의 반추상 도안이 기묘할 정도로 잘 어울리는 일격 접시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