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磁陽刻牧童吹笛文注子 높이 8.4cm
2012년11월6일 서울옥션 제3회 ART FOR INTERIOR-茶道 No.37번 유찰
조선시대 후기에 백자 양각도자기가 갑작스런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대해 다행스럽게 참고할 만한 기록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 후기의 실학자 이규경(1788-1856)은 정조 때 사치풍조를 금하고자 백자에 비싼 청화안료를 사용을 금지시켰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정조 때 화채(畵彩) 번조를 금한 후, 백자 위에 꽃이나 풀 무늬를 볼록하게 양각하였으나 오래지 않아 다시 청채(靑彩)를 사용하였다’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양각의 백자가 만들어진 것은 18세기 후반이 된다. 그렇지만 현재 전하는 양각 백자는 거의가 19세기 이후의 것들이다. 그래서 정조 때 잠깐 만들어졌으나 그 후 청화를 다시 쓰게 되면서 이 기법은 잊혀 졌는데 그것이 19세기 들어 취미, 취향의 시대가 열리면서 다시 부활했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백자양각 주전자는 어떤가. 놀랍게도 이는 18세기 후반의 분원 산이다. 그것은 질 좋은 백토의 색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백자색을 통해 확인이 가능하다. 그러니까 이규경이 말한 그대로 정조의 사치금지령에 따라 대안으로 제작됐다는 바로 그 시대의 양각 백자인 것이다.
도자 전문가들은 양각으로 문양을 넣는 방식에 대해 백니필화(白泥筆畵)기법이 쓰였다고 한다. 백토를 물에 푼 뒤 이를 붓에 묻혀 그림 그리듯 문양을 그리면서 여러 번 도드라지게 한 것이다. 이 기법은 말처럼 간단하지가 않아 백니가 마르는 정도를 잘 따져봐야 하고 또 형태의 입체에 대한 감각이 있어야만 했다.
이 양각 주전자는 한쪽에 소를 타고 가며 피를 불고 있는 목동을 새겼다. 그리고 다른 면에는 해태로 보이는 동물을 양각으로 그려놓았다. 또 뚜껑에도 한가운데는 호랑이처럼 보이는 동물을 넣었다. 그 바깥쪽에는 갈기를 휘날리는 기린과 괴석에 기대어 풍류를 즐기는 고사를 그렸다. 이 정도만 해도 보통의 장식을 훨씬 뛰어 넘는데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손잡이는 도롱뇽이 꼬리를 길게 뻗고 있는 형상으로 해달았다. 반면 물 나오는 주구는 동정(動靜)의 조화처럼 아무런 문양도 없이 깨끗하게 두 번 휜 채로 붙였다.
솜씨를 다한 양각 문양도 그렇지만 더 하나 감상할 것이 있다. 직립한 형태이다. 주전자하면 으레 동체가 불룩한 둥그런 형태가 대부분인데 그에 비하면 파격적이라 할 만한 외형이다.
술 주전자로는 다소 작아 보이는 크기로 당시 약주전자로 쓰였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는 것이 이 선생의 말이다. 그리고 둥그렇고 높이가 있는 뚜껑은 그 자체로 잔으로도 쓸 수 있게 만든 것처럼도 보인다.
맑고 부드러운 백자색에 기교를 다한 양각 장식 그리고 파격으로 만든 형태 등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어 비록 18세기 후반에 잠깐 동안만 제작됐으나 그 시절의 양각 백자를 대표하는 일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물건이다.(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