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磁靑華辰砂彩蘭菊草蟲文偏甁 높이 19cm
2003년9월25일 서울옥션 제78회 미술품경매 No.158번 5억원 낙찰
단언컨대 19세기에 만들어진 편병 가운데 화려한 컬러로는 어디에도 뒤지지 않을 도자기이다. 18세기 후기부터 등장하기 시작하는 패랭이꽃과 국화가 주문양이다. 두 꽃 모두 줄기와 잎을 발색 좋은 청화를 써서 그렸다. 그 사이 사이로 나비도 한 쌍을 더했다.
이만해도 아담하고 운치 있는 분위기는 이미 손에 넣었다고 할만하다. 그런데 이런 취향에 아랑곳하지 않고 단번에 급회전했다. 흰 바탕에 낭자할 정도로 선명한 진사, 즉 산화동(酸化銅)을 써서 꽃을 그려 넣은 것이다. 세 송이 씩 그려진 패랭이꽃과 국화는 아마 종이에 그렸다면 당연히 종이를 뚫고 나올 정도로 보였을 만큼 당돌한 모습이다. 이로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화려하고 대담한 취향이 전신을 감싸게 됐다.
편병은 휴대용 용기이다. 끈을 끼워 들고 다닐 수 있도록 만드는 게 보통이고 어깨의 끈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다람쥐나 도롱뇽과 같은 작은 동물을 달아놓는다. 여기서는 고개를 쳐든 두꺼비를 달았고 눈에 청화를 찍어 악센트를 주었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편병의 치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양쪽 두꺼비 아래위로 쓰인 네 글자에 이 병을 다시 보게 만드는 힌트가 담겨있다. 글자는 수복강녕(壽福康寧). 잘 알다시피 건강하고 행복하게 장수하길 바란다는 말이다. 이 말을 무심코 흘려보내지 않는다면 글자 가운데에 앉아있는 두꺼비를 허투루 볼 수 없다.
청설모나 도롱뇽이 아니라 두꺼비를 달아놓은 것은 바로 재복(財福)의 상징으로 그가 동원됐음을 당연히 짐작케 된다. 이렇게 힌트의 문이 열리면 다음은 수월하다. 패랭이꽃과 국화도 유행에 따라 제멋대로 그린 게 아니다.
패랭이꽃의 한자말은 석죽화(石竹花)이다. 돌은 누가 뭐래도 장수를 가리킨다. 그리고 죽(zhú)은 중국말에서 성조가 다르긴 해도 축(祝, zhù)과 발음이 거의 닮았다. 즉 패랭이꽃은 장수 축하의 상징이다.
또 국화는 어떤가. 국화는 장수화로 불리면서 그 자체로 길상화(吉祥花)이기도 하다. 발음으로 보면 국화의 국(菊, jú)는 ‘산다’나 ‘살고 있다’는 거(居, jū)자와 발음이 비슷하다. ‘살기는 사는데 어떻게 사는가’는 설명하기 위해 국화 옆에는 보조물이 있기 마련이다.
여기서는 나비가 곁들여졌다. 나비는 한자로 호접(蝴蝶)이다. 이 중에 접자의 발음(dié)은 팔십 장수 늙은이를 가리키는 질(耋, dié)과 꼭 같다. 즉 나비도 장수를 상징하면서 그려졌다.
이렇게 해석하고 보면 패랭이꽃, 국화, 나비, 두꺼비 하나하나가 수복강녕을 대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중에서도 단연 장수가 돋보인다.
그렇다면 팔십 늙은이의 장수를 축원하는 이미지를 잔뜩 동원해놓은 뒤에 이팔청춘 같은 붉은 진사로 반전을 시도하는 형국이 되는데 이를 보면 조선 백자에는 천연덕스런 유머가 들어있다는 말이 새삼 허툰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