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磁鐵畵竹文偏甁 지름 22cm 높이 10.5 cm
2004년4월29일 서울옥션 제86회 미술품경매 No.31번 유찰
편병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멀리 초원 기마민족에까지 이어진다. 이들이 도자기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평소 말을 타고 다니면서 물을 넣어가지고 다니던 작은 가죽 자루를 도자기로 만든 것이 시작이었다. 그것이 접시 두 개를 마주 붙여 포갠 것으로 바꾸면서 편병 형태가 정착했다.
한국에 편병이 등장하는 것은 조선에 들어서이다. 고려 청자에는 보이지 않는다. 전성기에는 일체 찾아볼 수 없고 말기에 이르러 분청사기와 뒤섞인 시대에 비로소 병의 양 옆을 두드려 조금 납작하게 한 병이 등장한다. 그리고 조선에 들어와 백자 시대가 되면 제대로 만든 편병이 모습을 보인다. 이를 고려하면 명나라 청화백자에 보이는 편병에 어떤 영향을 받은 것으로도 여겨진다.
자라병은 편병을 옆으로 누인 발상에서 시작한다. 아예 옆으로 뉘어 100% 안정감을 택한 것이다. 이런 형태의 자라병은 중국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자라병은 편병이 등장한 때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분청사기부터 만들어졌다. 분청사기는 관요와는 무관한 민요 제작임을 고려하면 자라병 역시 민간의 자유로운 발상을 근거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추정해볼 수 있다.
이 백자 철화죽문 자라병은 분청사기의 제작이 끊어진 17세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잘 알다시피 분청사기는 임진왜란을 경계로 씻은 듯이 그 흔적을 감추고 만다. 그리고 열린 것이 백자 전성의 시대이다.
이 백자 자라병은 17세기 후반 경기도 광주일대의 가마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짧은 기간 동안 소량만 만들고 더 이상 만들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날 이런 형태의 자라병을 마주할 기회가 매우 드물다.
한 시대의 소량 제작품이지만 제작에는 숙련된 도공과 화수(畵手)가 동원됐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솜씨가 담겨있다. 우선 일반적으로 유선형 모습의 자라병과 달리 몸체 옆면의 각을 세웠다. 그러나 여기에도 조선적 미감(美感)이 발동해 면과 면이 만나는 선은 부드럽기 그지없다. 아래쪽에 넓은 면에 굽을 달아 목적하는 바의 안정성을 최대한 살렸는데 이 역시 전체의 안정된 비례감을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그림 솜씨이다. 철채 안료로 그린 ‘쓱쓱’ 친 댓잎의 모습은 도화서 화원의 시험에서 가중치가 가장 높았던 대나무 그림에 어느 정도 익숙한 화공의 솜씨임을 한 눈에 짐작하게 한다. 임진왜란 이후 한동안 계속된 물자부족 시대를 대표하는 철화백자 가운데에서도 탁월한 솜씨를 보인 자라병의 하나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