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磁靑華四君子文四角甁 높이 19.3cm
2009년6월30일 서울옥션 제114회미술품경매 No.144번 유찰
조선시대 도자기에는 당당한 듯한 오해가 있다. 도자기를 사용하는 사람이 주로 여인들이란 데서 비롯된 것으로 흔히 여인 용품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실제로 해방 전후에 글씨를 잘 썼을 뿐만 아니라 도자기 컬렉터로도 유명했던 모 인사는 청자와 달리 백자를 그리 높이 치지 않았다. 특히 백자항아리는 쳐다보지도 않으려 했다. 이유는 ‘부엌세간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병은 아마도 그 같은 오해를 풀어주기에 적합한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병은 말할 것도 없이 용도는 술병이다. 그 중에서도 운치가 있기로 이름난 사각 병이다. 이 사각병의 네 면에 청화로 그린 문양은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이다.
매난국죽. 바로 사군자인데 사군자는 조선시대 양반, 문인들이 전 생애에 걸쳐 도달하고자 한 지난한 목표였던 군자(君子)를 상징하는 것들이다. 따라서 사군자 치장물은 말할 것도 없이 ‘부엌세간’과 무관한 당당한 양반, 문인들의 애호물(愛好物)이라 할 수 있다.
실제 그들이 이런 청화백자를 챙겼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기록도 있다. 『시장으로 나간 조선백자』(박은숙 지음)을 보면 선조의 증손자인 화창군 이연(1640-1686)은 관례상 왕족이 맡게 돼 있는 사옹원 제조(提調)를 맡았을 때 어용 자기를 제조할 때마다 자신이 쓸 그릇의 상납을 요구해 큰 물의를 일으켰다고 돼 있다.
이렇게 분원에 대고 자기 쓸 물건을 요구하는 일은 화창군에게만 있었던 일은 아니다. 정조 때에도 사옹원 제조였던 종친 안춘군 이륭, 서춘군 이엽, 서청군 이성 등이 규정된 자기 이외에 별도의 기이하고 교묘한 자기를 만들 것을 강요해 문제가 되었다는 사실이 『정조실록』에 나온다.( 『시장으로 나간 조선백자』 인용)
종친은 물론이요 선비, 양반, 문인들도 조선후기가 되면 자신들의 일상용품은 물론이요 사교 생활에서 기품을 더해줄 도자기를 스스로 찾았다. 분원은 원래 궁중과 관청 소용품만 제작토록 돼 있었는 곳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만도 않았다. 진상외품(進上外品) 즉 퇴기(退器)들의 시장 유통이 일부 허용됐다. 또 애초부터 진상과는 무관하게 관련 관원들의 요청에 따라 제작된 분원 도자기들도 많이 있었다.
이 사각병은 사군자 문양의 격식으로 보아 품격이 높지만 궁중과 관청용 일급의 진상품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렇기는 해도 한번 꺾어 돌린 구연부, 어깨에 각을 주어 면을 나누고 당초문과 파도문을 따라 그린 점 그리고 몸 전체의 능숙해 보이는 사군자 필치 등은 분원의 솜씨가 아니고서는 다른 데서 찾아볼 수 없다.
병의 굽은 안을 파내고 모래받침을 하여 구운 흔적을 보여주는데 이는 18세기후반 19세기 전반의 분원도자기에서 전형적으로 보이는 특징이다.(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