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磁靑花菊花文甁 높이 39.2cm
2012년9월26일 서울옥션 제125회 미술품경매 No.426번, 5000만원 낙찰
조선후기 백자 생산의 본거지라고 할 광주 분원은 잘 알다시피 임금의 수라와 대궐의 식사 공급에 관한 일을 관장하는 사옹원 소속이다. 사옹원은 대군이나 왕자가 맡는 도제조(都提調, 정1품) 아래 20-30명의 관리가 있지만 사실상 분원을 직접 책임지고 관리하는 사람은 제조와 번조관이었다.
제조는 대신(大臣) 클래스인 종2품 관직이 맡아 분원업무의 전반을 책임진다. 그 아래서 실무는 당연히 번조관(燔造官)이 맡았다. 번조관은 사옹원의 봉사(奉事, 종8품) 3명이 번갈아 맡았다. 이들은 자신의 순번이 되면 한양의 사옹원(본원)과 분원을 오가면서 현장실무를 관리했다.
분원에서 그림을 그릴 사람, 즉 화수(畵手)이 필요할 경우는 번조관이 도화서에 연락을 취해 화원을 데리고 광주 분원에 내려가 그림을 그리게 한 것이다. 만인 번조관이 자신의 업무일지 같은 것을 써서 남겼다면 분원에 간 화원은 물론 그가 어떤 그림을 그렸는가를 짐작해 볼 수 있겠지만 불행히도 이런 기록은 남아있는 게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조관을 따라 분원에 출장 간 화원 솜씨로 여겨지는 도자기가 바로 이 병이다. 이 병은 주병(酒甁)의 일종이다. 목이 길고 몸통이 동그란 게 전형적인 18세기 후반에서 말기의 형태이다. 19세기로 시대가 바뀌면 엉덩이가 처진 듯이 중심이 아래로 더 내려온다.
문양은 청화로 국화문을 가득 채웠다. 이 병을 보고 번조관을 따라간 화원의 솜씨라고 보게 되는 구륵(鉤勒) 기법으로 그려 넣은 국화문양 때문이다. 구륵 기법이란 윤곽을 그리고 나서 윤곽선 사이의 공간에 색을 칠해 넣는 기법을 말한다. 그래서 윤곽을 강조할 때는 쌍구법(雙鉤法)이라도 하고 채색을 칠해 넣은 것에 초점을 맞추면 구륵전채법(鉤勒塡彩法)이라고도 부른다.
도자기에 그림이나 문양을 그리는 것은 종이위에 그림을 그린 것과는 다르다. 도자기의 그림은 초벌구이를 한 뒤에 그린다. 이때 초벌구이한 도자기는 바짝 말라 있어 물감을 묻힌 붓을 대면 ‘쏴’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물기를 빨아들인다. 그런 만큼 초보는 도저히 붓을 댈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이다. 따라서 붓 놀리는데 익숙한, 솜씨 있는 화가라야만 원하는 필획(筆劃)을 얻게 된다.
그런데 구륵 기법은 예전부터 화원 기법이라고도 여겨졌다. 즉 채색을 주로 사용하고 정교한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윤곽선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윤곽선 없이 붓을 눕혀 면(面)적인 표현을 하는 기법을 몰골법(沒骨法)이라고 한다. 이는 채색이 전문이 아닐뿐더러 학문하는 여가나 틈이 날 때 들고 있는 붓으로 그대로 먹 그림을 그린 문인들이 즐겨 쓰던 기법이라고 해 문인화풍의 그림과 짝이 되는 기법으로 간주됐다.
백자청화 사군자문 각병 18세기후반-19세기초 높이 20.8cm 일본 개인
18세기 들어 문인화풍이 화원들 사회에까지 유행하면서 분원 도자기에도 몰골기법으로 윤곽선을 그리지 않고 그린 문양이 다수 그려졌다. 그런 문양에 비하면 이 병의 국화문양은 마치 밑그림만 그리고 손을 뗀 것처럼 구륵기법 일색이다. 그리고 아주 옅은 청화로 그 사이사이를 살짝 칠하고 말았다.
이러고 보니 이 병의 국화는 국화꽃 그림이라기보다 훨씬 공예적 도안처럼 보이게 됐다. 엷은 청화색 사이로 도드라져 보이는 선의 필치는 흔히 ‘내사병’이라고 불리는 병들과 나란히 이 병이 궁중용도로 제작된 수준 높은 완성도를 말해주고 있다.(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