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磁靑花辰砂 雲龍文 壺 높이 45cm
2009년12월20일 서울옥션 제115회 미술품경매 No.422번, 유찰
구연부가 아주 높게 똑바로 올라간 점이 먼저 눈에 뜨이는 운용문 항아리이다. 이렇게 구연부가 직립된 형태는 19세기 중반 이후에 보이는 분원 가마의 한 특징이다. 물론 뚜껑을 덮어 사용하기 위한 고안이다.
이 항아리는 그 외에도 볼거리가 많다. 중심을 높게 잡아 듬직한 위에 훤칠한 느낌도 그렇다. 이런 점도 볼만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청화 외에 진사를 사용한 점이다. 용은 물론 구름과 여의두문 묘사에 진사를 사용해 품위를 한껏 끌어올렸다.
진사(辰砂)는 붉은 색을 띠는 주사로 불리는 광물이다. 안료로도 쓰이지만 도자기 안료와는 무관하다. 붉은 발색이 진사를 닮아 붙여진 이름으로 정작 도자기 안료로 쓰인 것은 적동광이라고 불리는 광물에서 추출한 산화동(酸化銅)이다. 이것이 가마 안에서 화학 변화를 일으켜 짙고 강한 붉은 색을 내게 된다.
백자청화진사 운용문 항아리 높이 45.2cm
조선시대에 도자기에 코발트의 청색 이외에 낼 수 있는 색은 이를 사용한 붉은 색이 거의 유일했다. 하지만 코발트에 비해 산화동은 가마 속에서 쉽게 휘발하기 때문에 원하는 색을 얻기 힘들었다. 따라서 제작 사례가 많지 않고 전하는 것도 적다.
전문가 이선생의 말에 따르면 같은 시대의 청화백자 용문항아리에 비해 적게는 3배에서 많게는 10배 이상 차이가 난다고 한다. 진사, 즉 산화동을 사용해 문양을 넣은 항아리는 그만큼 귀하다는 말이다.
운용문 항아리는 당시 분원 도자기중에서도 最高價의 제품이었다. 당시는 이를 용준(龍尊)이라고 불렀다. 이 항아리가 제작된 19세기 중반에서 좀 더 시간이 지나 1883년이 되면 분원 자체가 민영화된다. 이때 용문항아리를 궁궐 그리고 왕가에 납품했을 때 가격을 얼마로 한다고 밝힌 기록이 있다.
민영화된 분원자기공소에서 궁궐과 성균관, 능원 등에 그릇을 제조해 납품할 때 받은 가격-이를 공가(貢價)라고 했다-가운데 용준이 가장 비쌌다.(인사동 고미술시장에서 용충이라고 부르는 말은 이 용준의 와언(訛言)이다). 한 점에 8냥이댜.
당시 공가표에서 용준과 나란히 가장 고가였던 것은 대침항(大沈缸)으로 이 역시 8냥으로 돼 있다. 대침항은 어떤 항아리를 가리키는지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18, 19세기에 일본 규슈에서 만들어진 도자기 가운데 이런 항아리 형태에 구연부가 높은 것을 가리켜 향을 넣어두고 쓰던 항아리라고 하면서 침향호(沈香壺)로 부르고 있어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 외 흔히 장군으로 부르는 장본(獐本)과 서있는 항아리(入缸)은 각각 2냥이 메겨져 있다. 또 주발은 5전, 큰사발은 2전, 백접시는 8푼이었다. 이를 보면 용준, 즉 용문 항아리가 별격의 대접을 받은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가격표에는 궁궐이나 능묘 외에 내전에서 임금 등이 직접 사용한 도자기는 약간 더 비싼 것으로 나타나 있는데 용준의 경우도 8냥5전이 메겨져 있다. 이 자료를 연구한 박은숙씨에 따르면 당시 1884년 무렵의 쌀 1되는 7-8전이라고 한다. 따라서 8냥이면 쌀로 10말, 즉 쌀 두가마니 가격이라고 볼 수 있다.
선묘조 제재 경수연도(宣廟朝 諸宰慶壽宴圖), 부분 홍익대학교박물관
이 항아리는 산화동을 사용한 위에 하나 더 눈길을 끄는 것이 당시 큰 항아리는 으레 짝으로 만들었는데 그것이 그대로 전해 남은 점이다. 조선시대 행사도 가운데 종종 대형 항아리가 등장하는 경우가 있다. 1605년에 열린 한양의 한 장수축하연을 그린 그림(사진은 18세기 중반의 이모본)에도 쌍으로 된 항아리가 행사에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