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磁靑花 長生文 壺 높이39cm
2010년3월11일 서울옥션 제116회 미술품경매 No.91번, 유찰
18세기후반 조선백자의 절정기에 만들어진 백자청화 장생문 항아리이다. 이 시기는 궁중과 관아에서 소용되는 백자는 사옹원의 광주 분원(分院)에서 만들어졌다. 밝지 않고 은은한 백자의 색에서 잘 가려진 태토가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꼼꼼한 솜씨의 세련된 문양 역시 분원 절정기 때의 모습을 그대도 말해준다. 목 아래에 여의두문을 둘러 하늘의 경계로 삼았다. 또 허리 아래에도 청화 선을 그어 땅을 삼았다. 하늘과 땅 사이의 허공이 무대이다. 이 사이에 연무에 가려진 태양이 떠있고 이를 사이에 두고 날개를 펼친 암수 한 쌍이 학이 크게 그려져 있다.
땅에는 사슴 한 쌍이 노니는 모습이이 영지가 나 있는 들판을 배경으로 그려져 있다. 크게 뿔이 난 숫사슴은 영지를 한 뿌리 입에 물고 있다. 뒤쪽의 문양으로는 크게 굽은 소나무가 근사하게 그려져 있다. 또 대나무도 있다.
해와 구름 그리고 학과 사슴, 영지, 소나무, 대나무는 모두 장수를 상징하는 것들이다. 이런 장수 상징이 백자에 그려지기 시작하는 것은 18세기 들어서부터이다. 그리고 19세기로 넘어가면 흔하다고 할 정도로 잦아진다.
장생문이 그려지는 것은 당시의 사회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또 어느 면에서는 경제와도 관련이 있다. 18세기 중반이후 조선 경제는 과열를 보일 정도로 호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상평통보 발행으로 화폐경제체제가 도입된 이래 유통 경제가 크게 발전했다. 또 일본과 중국의 가운데 서서 이들을 잇는 연계무역도 활기를 띠고 있었다.
일본은 당시 조선의 면포와 인삼 등을 대량 수입하고 있었다. 결제에는 이시미(石見) 은 광산에서 대량 채굴된 은이 쓰였다. 이 은은 부산 왜관을 통해 조선에 들어와 연행사절이 북경에 가지고 가는 무역자금으로 바뀌었다. 즉 중국의 서화나 서책은 물론 최신 상품 등을 구입하는 자금으로 쓰였다. 일본 게이오대학의 근세사전공의 다시로 가즈이(田代和生) 명예교수가 이 시대에 조선, 일본, 중국 사이에는 실버로드라고 부를만한 교역체계가 성립해 있었다고 말할 정도이다.*
이런 때문에 영정조 시대에는 상류층을 위해 대량 수입된 중국 비단에 대해 여러 번 수입 금지령이 내려졌을 정도이다. 이처럼 경제가 활기를 띠고 사치품이 나돌아 다니게 되면서 사회도 전과 다른 새로운 분위기를 보였다. 즉 유교의 엄격한 수양주의 내지는 절제의 정신이 완화된 것이다. 대신 세상의 행복을 만끽하려는 현세주의가 그 틈새에 등장했다.
장수는 높은 관직과 자손다복과 함께 그 시절 모두가 누리고 싶어 했던 바람을 대표한다. 장수를 바라는 현세적 욕망이 도자기에까지 표현된 것이 말할 것도 없이 장생(長生) 문양이다. 실제로 조선전기에 해당하는 15세기의 청화백자를 보면 매화나 대나무 문양은 보일망정 영지버섯이나 사슴, 거북 따위가 그려진 적은 한 번도 없다.
분원 전성기를 맞아 세상의 관심을 반영한 현세적 행복주의가 문양으로 나타난 것이 이 잘 생긴 백자청화 장생문 항아리라고 할 수 있다.(y)
(주)
*미야케 히데토시 지음, 김세민 등 옮김 『조선통신사와 일본』 지성의 샘, 199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