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자청화 송하인물위기문 항아리
白磁靑花 松下人物圍碁文壺 높이36.5cm
2015년5월31일 서울옥션 제15회홍콩경매 No.112번, 950만 홍콩달러 낙찰
눈이 놀랄 정도의 그림이 그려진 도자기이다. 조선시대 도자기에 인물문양은 매우 드물다. 이 항아리도 반대쪽에는 괴석에 난초를 그렸다. 그 위에 약방의 감초처럼 벌처럼 보이는 곤충이 날고 있다. 곁에 날개를 펼친 학도 한 마리 보인다. 괴석과 난초, 초충 등의 그림은 18세기 이후의 청화백자에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문양이다.
하지만 전면에 보이는 인물문양은 다르다. 그림같이 본격적인 솜씨이다. 과거에 문양으로 슬쩍 그려 넣던 것과는 천양지차를 보인다. 인물문이 그려진 도자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항아리에는 귀하다. 그보다 술병으로 쓰인 각병에 압도적으로 많다.
이런 사정을 고려하면 이 항아리의 그림 같은 인물문은 매우 희귀한 케이스이다. 그려진 인물들도 보통 사람들은 아니다. 흰 수염과 흰 눈썹이 단번에 이들이 상산사호(商山四皓)임을 말해준다. 상산사호는 진나라 말기에 섬서성 상산으로 난을 피해 들어간 네 사람의 은자를 가리킨다. 이들은 모두 수염과 눈썹이 모두 희어 사호(四皓)라고 불렸고 이들의 산중 소일거리가 바둑이었다.
도자기에 이런 고사(故事)류나 일화류가 그려진 경우가 없지 않다. 하지만 상산사호를 테마로 한 것은 지금까지 알려진 사례가 없다. 이 청화백자는 18세기중반 무렵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근거는 그림이 아니라 백자의 색이다.
전문가 이선생의 관찰에 따르면 금사리 가마의 태토가 약간 남아 있는 듯하다는 것이다. 즉 백자의 색에 금사리 가마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은 듯 한 색감을 보인다는 점이다. 금사리 가마에서 구워진 도자기의 색은 설백색(雪白色) 계통이다. 이는 1752년 무렵으로 여겨지는 분원 설치 이후의 태토에서 보이는 유백색(乳白色) 느낌과는 다른 것이다.
분원 설치 전후에 최고의 솜씨가 동원돼 만들어졌다는 추정이다. 당시는 영조시대(재위 1724-1776)였다. 탕평책 실시로 당파간의 세력 균형 아래에 정국이 운영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제아무리 백자를 선호하는 사대부라고 해도 주위를 의식하지 않고 화수(畵手)를 불러 사적인 항아리를 제작하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이만한 솜씨가 담긴 항아리는 궁중과 왕실용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도자기의 아래 부분에 두줄의 선을 돌리고 목과 몸통이 시작하는데도 선을 두른 것은 이 시대의 전통이다. 청백(靑白)의 콘트라스트를 살리 여의두문양도 마찬가지이다. 화가의 솜씨로는 인물도 그렇지만 옹이까지 그려넣은 소나무 묘사도 빼놓을 수 없다. 또 난초 괴석의 장면에서도 멀리 푸른 산을 그려 넣은 것도 문인화풍의 그림에 익숙한 화가의 솜씨로 추정되는 부분이다.
이 항아리는 80년 넘게 도판으로만 알려져 온 환상(幻想)의 유물이라 할 수 있다. 이 항아리가 실린 도록은 ‘조선공예전람회도록’이다. 일제때 대형 미술상이었던 문명(文明)상회가 일본에서 한국미술품 전시를 열면서 발행한 도록이다. 1934년부터 41년까지 5차례가 열렸는데 이 항아리가 실린 것은 1939년11월에 열린 전람회에 출품되면서 도록에 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