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자 철화초화문 항아리
白磁鐵畵 草花文 壺 높이26.5cm
2009년3월26일 서울옥션 제113회 미술품경매 No.33번, 유찰
자세히 보면 엉덩이가 들려있는 것처럼 보이는 항아리다. 이는 무게 중심을 중앙에 있는 데서 오는 느낌이다. 또 굽의 폭이 구연부에 비해 절반도 되지 않을 정도로 작은 것도 이런 느낌을 더해준다. 이렇게 항아리의 중심이 위쪽으로 바짝 올라가 있는 형태가 16세기적 특징이다.
그러고 보면 구연부가 밖으로 말리면서 벌어진 모습도 이 시대만의 특징이랄 수 있다. 이렇게 말린 구연부는 금사리 백자항아리 시대로 내려오면 각진 선이 보일 정도로 절도 있게 밖으로 벌어지는 형태로 바뀐다. 이런 16세기의 항아리에는 태토의 색이 아직 그리 밝지 않은 것이 일반적인 성격도 보인다.
이 항아리는 어깨에 두 줄의 음각선을 두르고 그에 걸치도록 초화문을 철화, 즉 산화철로 그렸다. 문양은 추상적인 넝쿨 문양이다. 철화로 그린 초화문하면 우선 16세기 계룡산기슭의 민간가마에서 만든 철화문 분청사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분청에 철화로 그린 초화문은 이 항아리와 달리 보다 훨씬 간결하고 심플하다. 여기서 보는 것처럼 넝쿨 문양도 보이지만 이토록 길게 연결된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대개 아래위로 그어져 있는 선에 맞추어 그 사이에서만 그려져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므로 이 항아리에서처럼 위로 올라가 다시 옆으로 뻗고 아래로 말리는 등 연속된 선이 넓은 몸체를 배경으로 그려진 경우는 거의 없다. 이 문양에 보이는 활달한 선은 애초에 어떤 의도나 계산 없이 시작된 것이다. 붓을 잡은 사람이 마음 내키는 대로, 뜻 가는 대로, 그리고 손이 시키는 대로 그은 것이다.
도자기 위에 계산 되지 않은 채로 시작해 두 번 다시 되풀이 할 수 없는 무정형의 형태로 끝나는 문양이 그려지는 것은 조선 도자기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 중의 특징이다.
도자기를 만드는 나라치고 이렇게 무계획적이고 무정형의 문양을 애초부터 자유롭게 허용하고 또 결과적으로 대담하게 받아들인 나라는 지구상에 단 한 곳도 없다. 중국도 그렇고 일본도 그렇다. 서양의 프랑스, 독일, 영국에서조차 이런 문양은 결코 찾을 수 없다.
화수(畵手)에게 주어진 전적인 믿음과 신뢰가 어디에서 연유하는지는 도예사의 설명만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자유로움이 선호하는 어떤 정신이 분명코 존재해 이런 문양이 수백 년 동안 지속됐다는 사실만은 움직일 수 없다.(*)
이 시대의 항아리 중에는 상당히 큰 항아리로 많지안은 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