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자청화 초충문 항아리
白磁靑花 草蟲文 壺 높이21cm
2005년5월18일 서울옥션 제95회 미술품경매 No.100번, 1억5천만원 낙찰
몸 색깔이 뽀얀 백자입니다. 이렇게 눈처럼 고은 백자가 나오는 것은 분원 전성기입니다. 이 청화백자 항아리는 19세기중반 분원절정기를 대표한다고 할 만한 도자기입니다.
분원 전성기 때 볼만한 도자기가 많이 구워지지만 밖으로 눈을 돌리면 사회와 정치는 정체 중이었습니다. 이른바 세도정치 시기입니다.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가 번갈아 권력을 장악해 노른자위를 독식하면서 계층 순환의 사다리가 무력화됐습니다. 부작용으로 부정과 부패가 만연하고 사회와 경제에는 분배의 불균형으로 인한 왜곡이 극심해졌습니다.
그렇게 막히고 경색된 사회가 되면 의외의 곳에 바람구멍이 생기는 법입니다. 사치와 향락입니다. 유교 이념은 19세기 중반이 되면 허울만 남을 정도로 형해화하고 사람들은 세속적 욕망으로 치닫게 됩니다. 덩달아 사회 전반에 시각적, 촉각적 감수성이 예민해지면서 상층부의 생활용품은 보다 고급화되는 역설적 경향을 보입니다.
전성기 분원백자에 보이는 하이클래스한 세련미는 이런 배경 아래서 탄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흰 백토에 코발트로 그려진 문양은 도시적 감성을 반영하듯 깔끔하기 그지없습니다. 흐트러진 선하나 없으며 삐져나온 색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려진 문양은 괴석에 패랭이꽃, 국화 그리고 벌입니다. 모두 길상에 더해 문인 취향을 상징하는 것들입니다. 패랭이꽃은 석죽화로도 부릅니다. 흔히 괴석과 함께 영원히 변치 않음을 뜻하는 모티프로 자주 쓰입니다. 벌은 중국의 봉(封)자와 발음이 같아 관리 입신을 뜻하기도 합니다.
국화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꽃도 볼만하지만 그런 세속적 평가 외에 문인들이 달리 좋아하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안빈낙도(安貧樂道) 속에 찬란한 문학상의 업적을 남긴 도연명을 연상시키는 것을 우선 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늘 우주와 인생 전체를 철학적 테제로 삼으면서 끝없이 사색을 생애 과제로 삼는 유교적 문인들에게 국화는 가을의 상징 그 자체입니다. 순환하는 자연의 변화 속에 생명의 종착역을 향해 다가가는 가을에는 애잔함과 애처로움이 담겨있어 고독한 사색을 전문으로 하는 문인에게 더 없이 어울리는 계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문인적인 취향 역시 분원 백자의 전성기가 되면 하나의 패션으로 어레인지돼 도시 감각에 흡수됩니다. 따라서 괴석에 초충, 초화에 문인 상징의 국화까지 곁들여진 이 항아리는 그 같은 세련된 도시 감각을 지향하는 시대적 감성을 고스란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