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자청화 난국호접문 항아리
白磁靑花 蘭菊胡蝶文 壺 높이44.3cm
2010년6월29일 서울옥션 제117회 미술품경매 No.53번, 유찰
이 항아리 역시 같은 18세기 중엽에 분원에서 제작된 것입니다. 똑바로 고추선 구연부, 강한 어깨 그리고 그 어깨에서 바닥면으로 천천히 흐르면서 전혀 긴장을 늦추지 않는 힘찬 선에서 또 한 번 준수함을 느껴보게 됩니다.
앞서 소개한 항아리와 다른 점이 있다면 지면을 상정하고 그은 청화선이 사라졌다는 점입니다. 어깨의 어의두문 아래에서 밑바닥 마름 선까지가 모두 화면이 됐습니다. 그런 다음 이 넓은 화면 위에 솜씨 좋은 화수(畵手)가 그림을 그려 넣었습니다.
좀 다른 얘기입니다만 직접 미술사 연구자 중에는 직접 붓을 들었던 분들이 있습니다. 물론 과거 서화(書畵)가 문인의 교양이던 시절에는 중국에서도 그림 감식하는 잘 하는 사람이 그림도 잘 그리는 일은 수두룩했습니다.
몰두하다보면 저도 모르게 팔을 걷어붙이게 되는 것이지요. 한국미술사 연구의 개척자였던 김원룡 교수는 위트에 운치 있는 그림으로 이름 높았습니다. 이후 세대에도 정년이 지난 뒤에 묵희삼매(墨戱三昧)를 즐기는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정양모 前국립중앙박물관장도 그런 분중 한 사람입니다. 정 관장은 글씨를 잘 쓰십니다. 부친 정인보 선생처럼 동글동글한 글자가 아치가 있습니다. 이는 일전에 한번 일반에 소개되기도 했는데 실은 붓을 든 것은 종이가 아니라 도자기 위가 먼저입니다. 도자기에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어떤 일인가를 직접 알아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정 관장의 말씀에 따르면 바짝 마른 도자기에 붓을 대면 ‘쏴’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도자기가 붓의 물기를 도자기가 빨아들인다고 합니다. 당연히 종이 위 보다 몇 갑절 이상 힘든 일인 것이지요. 그런 체험 이후 도자기의 그림 솜씨를 다시 보게 됐다고 말하십니다.
이 항아리 그림 역시 붓 뻗어나가는 것을 보면 예사 솜씨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도자기에 그려진 그림은 디자인적 성격이 강합니다. 문양의 반복으로 회화성이 떨어지는데 이쪽은 그것을 넘어선 듯합니다.
한쪽은 괴석 사이로 난초가 피어있고 그 위에 큰 나비 하나가 날고 있습니다. 다른 쪽도 같은 테마이지만 돌을 아주 작게 해 나비를 한층 돋보이게 했습니다. 다른 면은 대륜 국화입니다.
동그란 지구를 네모나게 펼쳐서 보여주는 메르카토르 도법(Mercator's projection)을 이 항아리에 적용해 본다면 괴석에 파초, 국화 그리고 나비가 어우러진 한 폭의 근사한 가을정원 그림이 될 것입니다.(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