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자청화 파초국화문 항아리
白磁靑花 怪石盆栽文 壺 높이37.6cm
2004년4월29일 서울옥션 제86회 미술품경매 No.32, 4억6천만원 낙찰
이번에는 초화만이 아닙니다. 꽃과 풀은 뒷전이고 커다란 돌이 주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뒤편 문양 역시 수반에 받쳐진 돌입니다. 그 사이를 큰 나비 둘이 날고 있습니다. 청화백자의 문양은 18세기 후반 들어 종류가 크게 다양해집니다. 개중에는 이름 없는 풀과 꽃이 있는가 하면 매화, 국화, 연꽃, 대나무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런 식물들과 달리 불쑥 돌이 그려진 것도 있습니다.
한두 개 어쩌다가 그린 것이 아니라 작정하고 그려 넣은 듯 양이 제법 됩니다. 그리고 단독으로 보다는 이 항아리처럼 풀과 꽃 그리고 나비 등과 함께 세트를 이뤄 그려지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이를 보면 꽃과 풀 문양에 돌이 자리를 비집고 나중에 추가됐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옛 사람들은 돌을 참 좋아했습니다. 영원히 변치 않는 한결같은 모습을 흔히 문인들의 굳은 심지, 지조, 절개에 비유했습니다. 사대부들이 자신의 분신처럼 돌을 애호한 것은 송나라 때부터입니다. 글씨로 이름났을 뿐 아니라 그림 감상에도 뛰어났던 미불은 정말 돌에 심취했습니다. 돌에 절을 할 정도였습니다. 그의 일화는 당시부터 이름나 이른바 배석도(拜石)라는 고사(故事)인물화의 한 장르가 되기도 했습니다.
명대 후반 들어 돌은 조금 다른 모습으로 그림 속에 보입니다. 궁중 풍속화입니다. 궁중생활이란 요즘 식으로 말하면 민간이 선호하는 럭셔리한 생활의 상징입니다. 돌은 궁중 내의 이런 호화 유미한 생활을 돕는 장식물의 하나로 그려졌습니다. 이때의 돌은 커다란 좌대석에 올려진 태호석(太湖石)입니다.
태호석이란 중국 소주인근의 태호 주변에서 나는 돌로 기묘한 형태에 큰 구멍이 숭숭 나 있는 게 보통입니다. 이 돌을 북송의 문예군주 휘종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돌을 가져오는 일이라면 다리를 부수거나 민가도 파헤치는 일까지 기꺼이 눈감아주었습니다.
강세황 <괴석석류도> 견본담채 26.1x18.3cm 국립중앙박물관
이런 과정을 거쳐 태호석은 중국에서 좀 꾸몄다하는 정원에서 결코 빠져서는 안 될 요소가 됐습니다. 조선의 18세기에 중국 강남의 풍류문화가 대거 전해졌는데 그 과정에 태호석 애호풍조도 함께 따라 들어온 듯합니다. 당시의 문인화가 강세황이 그린 그림에 태호석이 있습니다. 그림에는 이 항아리의 문양처럼 돌 사이로 석류나무 한 가지와 큰 열매가 함께 그려져 있습니다.
이 항아리의 다른 문양은 대체로 18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항아리의 그것들과 비슷합니다. 구연부에 선을 하나 두르고 어깨가 만나는 곳에 다시 선을 두른 뒤에 여의두문을 뺑 둘러 그려 넣은 점이 그렇습니다. 굽으로 내려가지 직전에 선을 넣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항아리는 굽 안쪽에 ‘무신 경수궁 三’이라고 글자가 파져 있습니다. 경수궁은 정조의 후궁 화빈 윤씨(1765~1824)이 거처하던 곳입니다. 그녀가 죽은 뒤에는 제사를 모시는 궁묘(宮廟)로 쓰였다고도 합니다. 이런 사실과 대조해보면 18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이 항아리는 화빈 윤씨가 살아 있을 때 사용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렇다면 무신년은 1848년보다는 1788년에 해당할 것입니다. 기묘하게도 이런 글자가 새겨진 도자기가 또 있습니다. 이화여대박물관에 있는 백자청화 칠보화훼문 사각병입니다. 여기에도 같은 글귀가 보이는데 이 사각병은 아무리 보아도 19세기 제작입니다. 의문이 남는데 나란히 놓고 볼 기회가 없어 당분간 궁금증을 안고 있을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