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자청화 파초국화문 항아리
白磁靑花 芭蕉菊花文 壺 높이37.6cm
2006년12월12일 서울옥션 제104회 미술품경매 No. 123번, 4억원 낙찰
큰 키에 어깨가 자신 있게 벌어져 당당한 느낌이 물씬합니다. 그 위에 몸통을 꽉 채운 파초 문양 역시 항아리 전체에서 어떤 힘의 약동하고 있는 듯한 인상입니다.
구연부를 곧추 세우고 여의두문을 어깨가 시작되는 부분에 두른 것은 18세기 청화백자항아리에 흔히 보이는 형식미 그대로 있습니다. 더 부연하자면 구연부 위아래 부분에 청화 선을 두른 것 그리고 지면에 맞닿는 부분에 다시 청화 선을 둘러 깔끔한 마감을 시도한 것 등은 모두 이 시대에 보이는 통일된 스타일입니다.
비슷한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큼직하게 자리 잡은 파초는 당시도 그렇지만 지금도 별격(別格)입니다. 파초는 그림에서 조차 흔히 볼 수 있는 소재가 아닙니다. 공재 윤두서(1668-1715)와 겸재 정선(1676-1759) 정도의 시대가 되어야 비로소 그림 속에 파초가 등장합니다.
정선 <척재제시(惕齋題詩> 견본채색 28.5x33.0cm 간송미술관
파초는 열대 아시아산이라 중국 강남지방에 흔히 보던 다년생 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7세기후반 이후에 중국의 강남산(産) 화보(畵譜)들이 조선에 많이 전해졌습니다. 파초를 그린 공재나 겸재는 이들 화보를 통해 그림을 익힌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 항아리의 파초도 추측해 보면 그림 소재가 된 파초가 시간이 지나면서 공예에까지 들어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겸재의 파초와 이 항아리의 것을 비교하면 눈썰미가 예리하고 날카로웠던 겸재와 분원에 출장가 그림을 그린 화공의 솜씨 차이가 확연합니다. 파초의 줄기 처리가 한 예입니다.
이 항아리의 다른 면에는 국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두 줄기로 뻗어 항아리의 불룩한 어깨부분에 여러 송이의 꽃을 피운 모습입니다. 국화잎을 그리면서 윤곽을 그리지 않고 번지기 기법만으로 처리한 것은 여는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색적 기교입니다. 회화에서 이처럼 윤곽을 그리지 않는 기교를 몰골법이라고 하며 흔히 문인들이 즐겨 구사하는 기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기는 해도 파초는 사군자에는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국화와 짝이 되어 그려지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단, 한 가지 사례가 있다면 정조(1752-1800, 재위 1776-1800)가 그린 수묵 파초와 수묵 국화입니다. 이 두 그림은 짝으로 전해지며 오늘날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돼 있습니다. 물론 정조의 그림과 이 항아리 문양과의 관계는 전혀 짐작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그려진 국화꽃 묘사가 좀 남다릅니다. 국화는 18세기 이후 그림 교과서 역할을 한 『개자원화전보(芥子園畵傳)』(국화보)에 다수의 그 예시(例示, 사진)가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대개가 위에서 꽃을 내려다본 것들이 많습니다. 예컨대 국화의 작은 꽃잎들이 차바퀴 살처럼 방사형으로 뻗은 것처럼 그려져 있습니다.
예외가 평정정면(平頂正面), 즉 윗부분을 편평히 한 채로 앞에서 바라본 것입니다. 항아리 속의 청색 국화꽃 역시 앞에서 보았지만 시선에 의해 뒤쪽 반은 보이지 않는 형태로 그려졌습니다. 칼로 도려낸 듯이 위쪽을 생략했는데 그 기법이 여간 대담하지 않습니다. 『개자원화전』 속의 그것보다 훨씬 실감납니다.
그래서 이 특이한 국화를 처음 보면서 얼핏 일본의 풍속 판화가들의 그것을 먼저 떠올렸습니다. 우키요에(浮世繪)는 이런 사례가 여럿 있습니다. 찾아보면 가츠카와 슌쇼(勝川春章 1726?-1791) 그림에 윗면이 싹 뚝 잘려나간 것 같은 국화가 있습니다.
당시 분원에 그림 그리러 간 화원이 평소에 일본의 우키요에 국화를 보았는가 어쨌는가는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18세기는 외국서 들어오는 새로운 자극이 그림은 물론 이처럼 도자기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국화 보다는 파초가 분명합니다만.(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