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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옥션하우스의 명품들] 41. 백자 대호
  • 3020      

白磁 大壺 18세기전반 높이38cm
2006년 2월23일 서울옥션 제100회미술품경매, 6억원 낙찰


조선시대 도자기에 글자가 적혀 있는 것이 간혹 있습니다. 전기에는 대부분이 분청사기에 보이며 후기가 되면 19세기 이후 분원산 청화백자에 주로 보입니다. 물론 시대가 더 내려와황해도 봉산 일대에서 만든 이른바 해주가마 도자기에도 글귀가 보입니다.
그런데 조선 전기와 후기에 보이는 글자는 그 성격이 전혀 다릅니다. 분청사기의 글귀는 대부분이 관서명(官署名)입니다. 장흥고(長興庫, 궁중물품 관리조달 부서)를 비롯해 인수부(仁壽府, 세자를 위한 부서), 인녕부(仁寧府, 왕비를 위한 부서), 내자시(內資寺, 왕실 물자관리 부서, ), 내섬시(內贍寺, 관청 및 신하에 소용되는 물품관리 부서) 등의 이름이 보입니다.
반면 후기의 청화백자에 적힌 글귀는 시구이거나 아니면 부귀장수(富貴長壽)처럼 길상적인 사자성어(四字成語)입니다. 이는 해주가마 도자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잘 생긴 백자 항아리에는 전기의 전통을 이어받은 듯 ‘연령군것쥬방’이라는 글자가 굽 바로 위쪽의 몸통에 보입니다. 적어 넣은 것이 아니라 바늘로 꼭꼭 누른 듯이 새겨져 있습니다.
연령군(延齡君)의 이름은 이훤(李昍 1699-1719)으로 숙종의 여섯 번째 아들이며 영조의 배다른 동생입니다. 모친인 명빈 박씨가 일찍 죽자 5살때인 1703년에 군에 봉해지고 1707년에 결혼할 때까지 궁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니까 이 항아리는 1703년에서 1707년 사이, 즉 18세기 막 들어서서 만들어져 궁에 공납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항아리는 앞서 소개한 길쭉한 항아리와 달리 아주 동그랗습니다.
그래서 흔히 달 항아리라고 불리는데 이 항아리는 17세기 후반에 출현해 18세기 전반기까지만 제작됐습니다. 이를 고려하면 이 항아리는 달 항아리 시대의 한 가운데 무렵에 만들어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달이 차고 이지러지는 것에 비유하면 보름달에서 살짝 며칠 지난 무렵에 해당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절정기의 좋은 장점을 고루 갖췄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게 됩니다.
달 항아리에 대한 찬사는 도자기 학자라면 누구나 거쳐야하는 수사학 테스트 같은 것이 됐는데  최순우 전국립중앙박물관은 ‘의젓한 곡선미’ ‘어리숭하게 생긴 둥근 맛’ 등의 말로 표현했습니다.
최 전관장은 퇴고에 퇴고를 거듭해 글을 쓰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어리숭하다’는 말은 ‘어리숙하다’는 말과 전혀 달리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아니한 것 같기도 하여 분간하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 있습니다. 즉 달 항아리란 보는 때, 각도, 시간에 따라 천의 얼굴, 만의 표정을 지어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골라 쓴 듯 보입니다.
정양모 전관장도 달 항아리에 대해 ‘유유자적한 큰 도량’ ‘너그럽고 넉넉한 큰 멋’으로 자못 인격으로 승화된 표현을 했습니다.
아무튼 이 항아리는 달 항아리가 만들어진 100년 조금 안 되는 역사 속에서 정점 무렵을 지날 때 만들어진 뜻 깊은 항아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참고로 분청사기를 포함해 이 항아리에서처럼 글자를 적는 일은 멀리 태종, 세종 때부터 시작됐습니다. 태종 때인 1417년의『태종실록』에는 장흥고에 바치는 사기에는 ‘장흥고’라는 이름을 새겨 공납케 했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또 세종 때에는 도자기의 품질 향상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만든 도공 이름을 쓰게 한 이른바 생산자 실명제까지도 잠시 실시했다는 내용이 1421년의 실록 기록에 보입니다.(y)
   
 

글/사진 관리자
업데이트 2024.11.21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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