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磁壺 높이 36cm
2011년3월10일 서울옥션 제119회 미술품경매, 6100만원 낙찰
조선시대의 여러 군왕 가운데 도자기를 잘 아는 왕은 영조(재위 1724-1776)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라를 다스리기도 바쁜 군왕이 어째서 부엌세간 취급을 받는 도자기까지 알 수 있는가 하면 그는 세자 시설에 분원(分院)의 도제조(都提調)를 지냈습니다.
도제조는 관청의 총책임자는 아니지만 여러 일에 관해 자문을 해주는 관리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정1품의 정계 은퇴한 상공(相公)이나 종친부의 왕족들이 맡는 것이 보통입니다. 아래에 도제조를 보좌하는 제조가 있습니다.
아무튼 연잉군 시절, 분원의 도제조를 지낸 영조는 18세기 전반기의 분원 운영상의 문제점을 꿰뚫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의 재위 시절인 1752년에 경기도 광주 일대를 10년 단위로 이동하던 분원을 경기도 분원리(分院里)로 정착시킨 것은 그에게 이런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때까지 분원은 땔감과 백토의 운반이 용이한 곳을 찾아 옮겨 다니고 있었습니다. 도마리산 백자나 금사리산 백자라는 말은 그래서 나온 것입니다.
영조가 파악하고 있던 또 다른 문제는 분원 백자가 빼돌려진다는 것입니다. 분원은 사옹원의 한 부서입니다. 사옹원은 임금의 식사와 대궐안의 식사 공급-물론 연회, 제사도 포함 됩니다-을 관장하는 관서로서 여기서 분원을 시켜 그에 필요한 자기를 제작, 공급케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궁중에 사용될 자기들이 다른 곳으로 흘러나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관리들의 부정이 개입된 것이기는 하지만-제조를 맡은 종친들이 앞장섰다는 설도 있습니다-당시 시대 분위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영조 시대는 조선의 르네상스라고 할 만큼 다양한 문화가 꽃피우던 시대였습니다. 이는 이 시대에 문화와 예술에 이해가 높아지고 지원과 옹호가 확대됐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 외에 또 그를 향유하는 감상 계층도 전에 없이 넓어졌다는 사실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는 그림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눈이 높아진 감상층이란 생활에서도 고급 기물을 찾기 마련입니다.
이 백자항아리 역시 그 시절의 분위기를 십분 감안하면서 감상해볼 물건입니다. 크기는 36cm입니다. 백자항아리로서 1자를 넘기는 하지만 일물(逸物)의 기준이 40cm는 못 미칩니다. 그러나 사진만 보아서는 크기가 짐작되지 않을 정도로 균형감이 좋습니다.
균형감이라고 했습니다만 여기에는 시대적인 감각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조선시대에 균형감은 어깨가 이 항아리보다 좀 더 넓은 것을 꼽았습니다. 실제로 명품으로 선정된 항아리 중에는 그와 같은 타입이 많습니다.
이 항아리는 그에 비하면 조신한 편이고 크게 멋을 부리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부드러운 몸체의 선과 마지막을 약간 밖으로 벌린 이른바 외반(外反)된 모습의 굽은 한층 안정감을 줍니다.
궁중인가, 종친이가 아니면 사대부 집안의 용품(用品)인가는 확인이 불가능하지만 18세기 전반기의 기품을 담고 있는 백자 항아리라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습니다.(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