粉靑沙器 鐵畵唐草文 壺 16세기전반 높이16.8cm
2014년6월17일 서울옥션 제132회미술품경매 낙찰가 1750만원
푸른빛이 아닌 희뿌연 회색 나는 청자에 백토 물을 화장하듯 발라 구운 것이 분청사기입니다. 이것이 언제부터 제작됐는지는 딱 부러지게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종(재위 1418-1450)과 세조(재위 1455-1468) 시대를 거치면서 세련된 것들이 많이 만들어져 이 시기에 기법적으로 거의 완성됐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다가 1468년 경기도광주에 분원이 설치되면서 조락의 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곳에서는 궁중과 관청에 소용되는 백자를 집중적으로 대량 제작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이로 인해 사회 전체의 취향이 달라졌습니다. 너도나도 뽀얗고 깨끗한 백자를 선호했게 된 것입니다. 분청사기는 이런 시대의 흐름에 따라 16세기 중반을 넘어서면 거의 사라지게 됩니다.
이런 역사입니다만 그 가운데 이채를 발하는 것이 계룡산 가마의 분청입니다. 계룡산 분청은 알다시피 백토 분장 위에 짙고 선명한 철채 안료로 문양을 그린 게 특징입니다. 이 문양이 자유롭고 활달 무쌍합니다. 이는 자연 순응적이면서 한편으로 낙천적인 조선적 심성(心性)을 그대로 반영한 듯이 해석되면서 20세기 들어 크게 애호됐습니다.
그런데 실은 이런 분청을 구워낸 계룡산 가마는 한 곳이 아닙니다. 큰 산이 대전, 공주, 논산에 걸쳐 있듯이 가마도 이 일대 여기저기에 산재해 있습니다. 최근까지 조사된 바에 따르면 계룡산을 둘러싸고 학봉리, 온천리, 송곡리, 하신리, 중장리, 대전 계산동 등 무려 40여 군데나 있습니다.
그중에서 예부터 이름난 곳이 학봉리와 온천리입니다. 학봉리는 세종실록 때부터 이름이 등장합니다. 실제 이곳에서는 철채로 문양을 낸 분청 파편이 많이 나왔습니다. 문양은 가지가지입니다. 인화문, 어초문에 초엽문(草葉文)도 있습니다.
인화문과 어초문은 누구나 봐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초엽문은 간략화, 추상화가 뒤섞이면서 다소 복잡해졌습니다. 그래도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삼엽문처럼 형상이 분명한 것이 우선 있습니다. 다음이 몇 획의 반추상적 선묘로 그린 문양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이 완전한 추상의 영역으로 들어가 덩굴을 따라 문양이 반복되는 당초문양(唐草文樣)입니다.
당초문은 애초에 그리스에서 인동초나 파르메트 같은 식물을 반복해 쓴데서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중앙아시아를 거쳐 동쪽으로 전파되면서 점점 추상화됩니다.
이 작은 계룡산가마 항아리에 보이는 철화당초문은 딱딱한 기계적 추상은 아닙니다. 넉넉하고 자유로운 모습이 개념화된 중국 당초문이 바다를 건너 들어와 다시 조선식으로 풀어지는 현상을 보여주는 또 한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