粉靑沙器象嵌龍文扁甁 15세기전반 높이 32cm
2014년12월17일 서울옥션 제134회 Lot No.281 5,000만원 낙찰
고려에서 청자의 쇠퇴기는 흔히 충렬왕 때부터 시작된다고 합니다. 충렬왕은 원의 고려지배가 확실시된 이후의 첫 번째 왕입니다. 부인은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의 딸 제국대장공주입니다. 충렬왕은 잠시 아들에게 양위한 기간이 1년 정도 있습니다. 그러지만 이를 포함해 1274년부터 1308년까지 재위했습니다. 그의 재위가 끝나면서 고려에서 14세기가 열립니다.
고려의 왕실청자도 이 시기를 전후에 맥이 끊긴 듯합니다. 그 이전에 왕실자기는 전남 강진과 전북 부안에서 만들었습니다. 정확한 자료는 없습니다만 연구자들은 고려말 왕권이 쇠퇴하면서 강진과 부안 이외의 지방 각지에서도 소규모로 청자가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조금 수준이 떨어지는 말기 청자들입니다.
이를 만든 사람들은 강진, 부안에서 각 지방으로 흩어진 도공들입니다. 그래서 이런 일이 분청사기 출현과 발달의 원동력이 됐다고 보는 게 보통입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배경이 이렇기 때문에 분청사기는 기법도 형태도 청자를 닮은 것이 많습니다. 정양모 전국립중앙박물관장 같은 분은 기형의 70%는 청자에서 따온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이 병은 앞에서 보면 옥호춘병(玉壺春甁)처럼 보입니다. 몸체에서 목이 시작돼 올라가다 확 퍼지면서 주둥이가 있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를 옆에서 보면 몸통 양쪽이 편평합니다. 편병(扁甁)입니다. 이 역시 청자 유래입니다. 원래 편병은 이슬람권의 금속기에 보이는 형태입니다. 그것이 원나라에 들어와 도자기가 되었고 또 고려에 전해졌습니다.
이 용문 편병에는 고려 말의 원나라적 특징과 조선적 특징이 공존해 있습니다. 우선 빽빽한 문양입니다. 목 부분부터 몸체 아랫부분까지 7개의 문양띠가 보입니다. 물론 용문의 주문양도 포함해서입니다. 이렇게 빈틈없이 문양을 채우는 것은 원나라 자기에 나타나는 대표적인 특징입니다. 용문양 바로 위에 보이는 물결문양 역시 원나라 자기에 많은 파도 문양의 변형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용을 새긴 주문양은 전혀 느낌이 다릅니다. 조선시대 들어서 보이는 슬림한 모습의 용이 활달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입을 벌리고 눈을 크게 뜨고 있습니다. 기세가 느껴집니다. 또 몸체를 휘감고 있는 모습에서도 어떤 힘이 담긴 듯합니다. 정교하거나 섬세한 것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입니다.
정양모 관장은 분청사기의 이런 힘찬 느낌에 대해 “분청사기란 룰에 얽매이지 않는다. 룰에 얽매이지 앉는 자유분방함이 분청사기의 독특한 조형을 결정짓는데 중요한 원인을 제공했다고 믿어진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 용문 편병은 신구(新舊)의 영향과 기세가 조화를 이루며 수작을 만들어냈다고 말할 수 잇습니다. 병 자체도 균형이 볼만 합니다. 이런 사정을 모두 종합해보면 강진이나 부안에서 유래한 관요 출신의 도공 솜씨라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