粉靑沙器象嵌龍文梅甁 15세기 높이 32.5cm
2006년12월12일 서울옥션 제104회 Lot No.130 별도문의
당연하겠지만 한국의 도자 역사에는 외국과 다른 점이 여럿 있습니다. 중국 이외에 세계 어느 나라보다 자기를 가장 먼저 만든 것이 그렇고 상감기법 개발도 다른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 이런 것도 있습니다. 즉 청자에서 백자로의 이행기가 남달리 길다는 점입니다.
중국의 경우 이행기라고 할 만한 시기가 없습니다. 어느 때가 되면 청자는 싹 자취를 감춥니다. 원나라가 멸망하고 명이 되면 백자 세상이 됩니다. 명 황실에서 더러 회고(懷古) 취향으로 용천요를 시켜 청자를 만들게 했지만 그뿐입니다. 중국 각지에서는 모두 백자를 구웠습니다.
그런데 고려는 다릅니다. 청자가 백자로 바뀌는 시기에 비슷하게 분청사기도 출현합니다. 분청사기는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沙器)를 줄인 말입니다. 회청사기는 외형은 청자와 비슷해 보이지만 청자보다 질이 낮은 것을 가리킵니다. 청자는 정제된 강의 진흙을 사용합니다. 반면 분청사기는 그것보다 훨씬 거친 황토입니다. 그래서 굽고 나면 거친 느낌이 확연합니다.
그래서 이를 커버하기 위해 두 가지 방법이 고안됐습니다. 임팩트가 강한 문양을 상감 기법으로 넣는 것입니다. 시선을 잡아끄는 것이지요. 다른 하나는 백토 물로 화장을 시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속은 청자 계열이지만 겉은 백자처럼 보이게 한 것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분청사기는 청자 소멸이후 백자와 공존을 하게 됩니다. 백자 세계로의 완전한 이행까지 절반의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이행기가 무려 2백년이 넘었습니다.
세계에 이런 사례는 없습니다. 청자면 청자이고 백자면 백자일 뿐입니다. 백자 같은 청자(정확하게는 청자계통)가 2백년 넘게 공존한 사례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가. 설명이 쉽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자면 문양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중국 청자는 처음부터 문양이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상감기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청자의 볼만한 구석을 고안하기 위해서는 형태를 개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 원나라 때 코발트안료로 백자에 자유자재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청화(靑華) 기법이 개발됐습니다. 그러자 중국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백자의 시대로 넘어간 것입니다.
중국에도 물론 아무런 문양도 들어있지 않은 순백자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명나라 초에 제기용(祭器用)으로 만든 소수입니다. 중국 남방의 덕화요(德化窯)에서 보살 같은 형상을 백자로 만든 적이 있습니다. 이런 정도를 제외하면 명나라 백자에는 모두 문양이 있습니다. 처음에 푸른 청화만 쓰다가 이내 붉은색, 황색, 녹색, 자색 등이 더해지면서 오채(五彩) 안료가 개발됩니다.
반면에 조선은 초기에 이 코발트안료 구하기가 무척 힘들었습니다. 코발트는 중동 특산입니다. 중국도 멀리서 수입해다 썼습니다. 당연히 조선까지 전해줄 양이 안됐습니다. 도자사 연구자들은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조선초기 청화백자는 손으로 꼽을 정도로 그 수가 적다는 것입니다.
이외에도 여러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 중에는 감성적으로 조선에 잘 맞았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청자처럼 종교적이거나 숭고하지도 않고 또 백자에서와 같이 긴장된 절제도 적다는 점입니다. 아무튼 조선전기의 자기에서 분청사기는 절반의 줄기를 차지합니다.
이 용문 매병은 고려의 유풍(遺風)을 그대로 이어받았습니다. 어깨가 벌어지고 허리가 잘룩한 것이 우선 그렇습니다. 위아래에 연꽃잎 문양을 늘어세운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위쪽 연판문*(蓮瓣文), 즉 연꽃잎 문양을 감싸면서 여의두문(如意頭文)을 단 것도 고려청자에 흔히 보이는 수법입니다. 흑백 상감은 말할 것도 없는 필요조건입니다.
그런데 용 문양은 고려 때와 조금 달라졌습니다. 이런 말이 적합한지 모르겠습니다만 고려의 용은 풍만합니다. 특히 고려전기 음양각 시대의 용은 그렇게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던 것이 조선에 들어오면 이렇게 슬림형으로 바뀝니다. 발가락도 세으로 줄어듭니다.
분청사기의 용 문양은 선명한 때문인지 오랫동안 머릿속에 잘 남는다는 인상입니다.(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