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麗白磁陽刻花卉文碗 12세기전반 지름17.7cm
2008년6월18일 서울옥션 제111회미술품경매 Lot.144, 3000만원 낙찰
골동상인 뿐만 아니라 학계에서도 곧잘 쓰는 업계용어 중에 ‘고백’이란 생소한 말이 있습니다. ‘고백’은 이른바 고려백자를 줄인 말입니다. 고려하면 청자이고 조선은 백자인데 고려백자는 무엇이냐고 할 사람이 아마도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중국을 보면 애초부터 청자와 백자가 엇비슷하게 시작됐습니다. 중국 백자는 6세기 후반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러다 청자 완성에 맞춰 백자도 활발히 구워집니다.
북송 청자는 세계적으로 유명합니다. 이 시대 정요(定窯)에서 구운 정요백자 역시 최상급 수준을 자랑합니다. 고려청자는 절강성 일대의 월주(越州) 가마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근래 연구에 따르면 청자 기법이 고려에 전해지는 것과 거의 나란히 백자도 전래됐다는 것입니다.
고려백자 국화형 합(高麗白磁菊花形陰盒) 12세기후반 지름10.3cm
2008년6월18일 서울옥션 제111회미술품경매 Lot.145, 7000만원 낙찰
실제로 최건 전경기도박물관장의 말에 따르면 청자 도요지 근처에는 대개 백토가 소량이지만 나고 있다고 합니다. 즉 대개의 고려청자 가마에서는 청자와 백자를 함께 구웠던 것입니다.
이들 일련의 고려백자는 당시의 사정을 말해주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백자완은 안쪽에 연판문을 두르고 그 속에 꽃문양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살짝 보이는 굽을 보면 해무리 굽입니다.
굽은 바닥면과 닿는 부분을 말합니다. 초기 청자완은 굽에 특징이 있습니다. 해무리굽입니다. 이는 월주 가마의 전매특허라 할 수 있습니다. 초기 청자에는 월주식 그대로 마치 해무리가 진 것처럼 둥근 테가 넓적하게 굽을 이룹니다. 이 백자완에도 그와 같은 굽이 보이고있습니다.
고려백자 음각연화파어문 탁잔(高麗白磁陰刻蓮花波魚文托盞) 12세기후반 총높이14.4cm
2008년6월18일 서울옥션 제111회미술품경매 Lot.146, 1억~1억5천만원
그런데 백자라고 하면서 이상하게 맑지 않습니다. 이것이 고려백자의 특징이자 한계입니다. 백자와 청자의 차이는 흙입니다. 청자는 점토, 즉 찰기가 좋은 진흙을 사용합니다. 강가 같은데서 흔히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백토는 흙이라고 했지만 암석 일종입니다. 말하자면 자갈 같은 것이 땅속에서 오래 파묻혀, 썩은 것처럼 약간 푸석해진 것입니다. 이걸 갈아서 구운 것이 백자입니다. 그래서 좋은 백토의 발견이 백자 질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고려백자 음각연화문 병(高麗白磁陰刻蓮花文甁) 12세기중반 높이 33.5cm
2008년6월18일 서울옥션 제11회미술품경매 Lot.147, 별도문의
고려백자에 쓰인 흙은 점성이 강하지 않습니다. 구워놓아도 ‘탱’하는 강한 쇳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또 불순물이 많아 맑은 색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 백자는 그런 요소를 모두 갖췄습니다.(이를 전문적으로 연질(軟質)백자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문양과 기형의 형식은 송나라 그대로 입니다. 따라서 초기 양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습니다.
국화형 합은 당시 인기가 높았던 화장(化粧) 용기입니다. 이 합을 보면 빚은 뒤에 청자 유약을 발라 구운 것이 확연합니다. 정교한 홈에 고여 있는 유약은 청자유약답게 파르스름한 색을 띠고 있습니다. 이 합의 특징 중 하나는 굽이 없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런 형태의 굽에는 일반적으로 굽이 있습니다.
청자 음각연엽문 합, 지름7.1cm(서울옥션 제134회 출품, 3300만원 낙찰)
굽 없는 청자의 대표격으로 바릿대가 있습니다. 화장 용기를 만들면서 바릿대에 보이는 기준을 적용한 이유는 현재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색다르고 특이한 점에서 주목해볼만 합니다.
백자 잔과 잔탁은 찻잔과 받침 즉 소서(saucer)를 세트로 한 것입니다. 80년대 청자가 아직 귀했을 때 상감에 음각, 양각 문양을 잔뜩 넣은 이런 세트는 1억을 호가하기도 했습니다.
이 역시 상감 전성시대인 12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 영향을 충분히 받았습니다. 상감과 음양각의 세트를 모범으로 재현한 듯한 인상도 있습니다.
우선 잔의 입 닿는 부분, 흔히 구연부(口緣部)라고 합니다. 이곳은 물론 잔탁의 가장자리, 아래쪽 굽다리를 모두 꽃잎 포개놓은 듯이 꾸몄습니다.(이는 윤화(輪花)형이라고 하며 고급 잔과 잔탁에는 모두 적용돼 있습니다)
청자상감국화문 탁잔, 12세기후반 총높이12.6cm 국립중앙박물관
꽃잎마다에는 모란 꽃가지를 꺾어놓은 모양을 새겼습니다.(모란절지문(牧丹折枝文)입니다) 이는 상감청자에 보이는 국화가 모란으로만 바뀌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 고려백자 음각연화문병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12세기 중반입니다. 그런 점에서 앞서의 잔과 같은 시기에 같은 가마에 구은 것으로도 여겨집니다. 모두가 누르스름한 색에 청자 유약이 공통됩니다.
백자는 고려 시대부터 귀했습니다. 많이 만들지 않았습니다. 우선 흙이 이유였을 것입니다. 두 번째는 최건 전 경기도박물관장의 말대로 비교우위 면에서 송 백자를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실제 사례가 있습니다.
문공유 묘 출토품. 뒤쪽 세 점은 송나라 백자이다.
1159년에 죽은 고려의 병부상서, 즉 국방부장관을 지낸 문공유(文公裕) 무덤출토 일괄 유물입니다. 여기를 보면 상감청자와 함께 당시 중국에서 수입한 것으로 보이는 송 백자가 보입니다.
최고급 송백자를 앞에 놓고 누르스름한 고려백자는 상품적 가치가 떨어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용인의 서리 등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백자 생산을 중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백자를 만들기보다 선택과 집중을 통해 상감청자에 매진한 것이 12세기 후반의 일이 아니가 여겨집니다.
고려백자는 이렇게 얘기하면 실례가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느 면에서는 상감청자의 비춰지는 스포트라이트를 위해 그 이면에 페이스 페이커 역할을 한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이 있습니다.(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