靑磁陽刻竹節文瓢形注子 12세기전반 높이 32cm
2003년11월18일 서울옥션 제81회 미술품경매 추정가 3억~3억5천만원
대나무가 본격적으로 그림 소재가 된 것은 북송 시대입니다. 북송문인 소식(蘇軾 1037-1101)도 대나무를 즐겨 그렸습니다. 이종사촌 형이자 대나무 그림의 명수 문동(文同 1018-1079)에게 배운 것입니다. 그는 고정불변의 모습을 그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눈앞의 대나무는 모습이 늘 변하니 일일이 따라 그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잘 관찰한 뒤에 가슴 속에 떠오르는 가장 대나무다운 이미지를 그려야한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훗날 문인 화가들이 금과옥조로 여기게 된 흉중성죽론(胸中成竹論)입니다.
소식이 대나무를 그리면서 이런 말을 한 때는 11세기입니다. 그 당시 고려의 그림 기록은 거의 없습니다. 그가운데 인종 때 묵죽도를 그렸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노래 「정과정곡」을 지은 문인 정서(鄭敍)가 묵죽도를 그리고 시를 지었다고 했습니다.(『동문선』)
인종이 재위한 기간은 1122년부터 1146년까지입니다. 12세기 전반부에 해당합니다. 그러니까 북송 문인들이 대나무를 즐겨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려에도 전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대 분위기가 그래서인지 이 무렵 고려 도공들도 청자에 대나무를 표현했습니다. 앞서 나온 상감기법의 대나무 묘사는 이보다 뒤인 13세기의 것들입니다. 12세기까지는 음각, 양각이 전부였습니다.
이 호리병 형태의 청자는 음양각을 적절히 구사하면서 온통 대나무로 만든 것처럼 빗었습니다. 우선 대나무 줄기를 엮어서 호리병을 만든 것처럼 몸통을 처리했습니다. 그리고 마디는 선을 그어 음각으로 나타냈습니다.
물 나오는 주구(注口)는 뿌리 모습을 빌린 양 울퉁불퉁한 모습까지 섬세하게 처리했습니다. 군데군데 싹이 보이기도 합니다.
물음표처럼 휘어있는 손잡이는 쪼갠 대나무 줄기 둘을 포갠 모습으로 형상화했습니다. 손잡이 위와 병의 뚜껑 위에도조차 여린 대나무 줄기를 말은 것처럼 돌려서 끈 끼울 구멍을 만들었습니다.
대나무 총출동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고려 문인들이 대나무를 막 그리기 시작할 때 고려청자에도 이처럼 대나무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청자양각 죽절문 장경병 12세기 높이 33.6cm 삼성미술관리움 국보 제146호
이 병처럼 몸체 전체를 대나무 줄기로 묘사한 병이 또 있기는 합니다. 국보 제169호인 청자양각 죽절문 병입니다. 이 병은 밑이 넉넉한 위에 대나무 줄기가 쭉쭉 뻗어 위에서 합쳐지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사실적입니다. (이 병은 말 그대로 국보감입니다.
전문가 이선생은 다소 정도의 차이를 보이지만 두 죽절문 병은 같은 시기, 같은 가마에서 구워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그리고 이후에 더 이상 굽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