靑磁象嵌僧侶像扁壺 14세기 높이 27.5cm
2006년12월12일 서울옥션제104회 경매 추정가 1억7천만~2억원
청자 문양에 더러 사람을 새겨 넣은 게 있습니다. 붓으로 그릴 수 없었으니 당연히 상감기법입니다. 사람 모습을 상상해보면 표현이 간단치 않았을 것은 쉽게 짐작이 갑니다.
실제로 그 수는 매우 적습니다. 포도 넝쿨을 올라타고 있는 동자문(童子文)이 잘 알려져 있지만 열 손가락 미만입니다. 어른 모습으로 가면 훨씬 적습니다. 그런데 어른은 사회 생활하는 사람인지라 그 모습에서 시대나 사회분위기를 느끼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고려는 귀족의 사회였고 불교의 나라였습니다.
이 병에는 두 그루의 대나무 아래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사람이 새겨져 있습니다. 다리를 꼰 모습이 약간 부자연스럽지만 홈을 파 흙을 채워 색을 냈다고 하면 넘어가도 될 만한 대목입니다.
압권은 염주입니다. 사람모습의 윤곽에는 흑상감을 썼지만 여기는 반대로 했습니다. 흰 무리로 검은 염주 알이 훨씬 또렷하게 보이게 했습니다. 기발한 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문양에 대해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대나무 아래에 결가부좌를 하고 앉아서 천천히 염주를 헤며 수행하는 모습이라고. 불교에 조금이라도 조예가 있는 분이라면 이쯤 되면 자연히 떠오르는 게 있을 것입니다.
석가모니가 성불한 뒤에 자주 와 수행하며 설법했다는 왕사성(王舍城)의 죽림정사(竹林精舍)입니다. 그 정사 앞에는 연못도 있었다고 합니다. 혹시 아래쪽에 보이는 흑백의 곡선이 호수 물결을 나타낸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그런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고려청자 상당수는 불전(佛殿)에 쓰이던 용구였으므로 이런 상상도 어느 정도는 허용될 것 같습니다.
청자상감 송하탄금문 매병의 부분(왼쪽, 이대박)과 주악인물문 매병의 부분(이대박)
일화와 같은 사실적 표현의 사례는 또 있습니다. 고려청자에는 당시 귀족들의 우아한 풍류생활을 소재로 한 것이 있습니다. 소나무 아래에서 거문고를 타거나 연회에 초대된 악공의 연주 모습 역시 사실적 표현에 대한 의지가 충만했던 사례로 볼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덧붙이면 이 병은 앞뒤를 눌러 편평하게 한 편병(扁甁)입니다. 전문가 L선생은 이런 편병 중에 똑같이 마름모 꽃모양의 이중창-능화창(菱花窓)-을 보이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같은 가마에서 구운 것으로 볼 수 있답니다.
청자상감 금채수하원문 편호 14세기 25.5cm 국박 개성만월대출토
이쪽 문양은 위가 뭉텅 잘라져 나갔지만 능화창 안에는 원숭이가 두 손으로 복숭아를 받쳐 든 모습입니다. 그런데 능화창 윤곽도 그렇지만 그 옆에 백상감으로 된 당초문에 금이 발라져 있습니다. 금채(金彩)입니다.
측면 부분
금채는 고려청자 중 가장 화려한 기법입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은 너댓 사례뿐입니다. 그런 곳에서 함께 구웠으니 대나무 아래의 인물 역시 상당힌 존귀한 분을 나타내려 했다고 상상해도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입니다.(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