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12세기 높이 36.5cm
2013년4월23일 제2회 혼례&KIDS경매
도자기 문양으로 용이 그려진 것은 중국 송나라 때부터입니다. 용 문양은 중국고대부터 등장하지만 당송 때 비로소 황제의 상징이 됩니다. 그래서 왕실용 도자기에 용 문양이 쓰인 것도 이때부터라 할 수 있습니다.
송의 영향이 적지 않았던 고려에도 청자 문양 중에 용을 소재로 한 것이 제법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매병의 용 문양은 정말 특이합니다. 송이나 원나라 때 도자기는 빈 바탕에 용만 그려지는 것이 보통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파도를 올라타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됐습니다.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니라 여덟 마리나 됩니다.
이는 몸통을 참외처럼 골을 내서 여덟 조각으로 나눈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각 조각 마다 이중으로 된 창-마름모꼴 꽃잎처럼 보인다고 해서 능화창(菱花窓)이라 합니다-속에 파도를 타고 있는 용을 새겼습니다. 더욱이 매병의 뚜껑은 제짝이 남아있기가 쉽지 않은데 여기에는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도 또 용을 새겼습니다.
이렇게 되면 용이 아홉 마리가 됩니다. 흔히 얘기하는 용생구자(龍生九子)를 나타낸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구룡을 소재로 한 청자가 고려 때 전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일본 나라의 야마토분카칸(大和文華館)에 있는 고려청자 정병은 주둥이와 몸체 어깨에 9홉 마리의 용머리를 형상화했습니다. 이 매병과 정병은 비슷한 시기인 12세기에 제작됐습니다. 또한 제작지 역시 모두 전남 강진으로 추정됩니다.
청자구룡형 정병, 12세기 높이33.3cm 야마토분카칸 일본 중요문화재
한쪽은 흙을 빗어 용을 형상화했다면 여기에는 양각으로 새겼습니다. 뾰족한 것으로 그어 문양을 새기는 음각에 비하면 공력이 곱절 이상 드는 것이 양각(陽刻) 기법입니다. 주변을 살짝 걷어내 용 부분과 능화창살을 도드라지게 했습니다. 그리고 창 사이에도 빈틈 하나 없도록 모란당초문을 새겼습니다.
모란당초는 현실에는 없는 식물입니다. 덩굴을 따라 화사한 모란꽃과 이파리가 계속해서 피고 만발하게 해 더없이 아름다운 상상의 세계를 연출한 것입니다. 구용도 그렇지만 거기에 모란당초문을 더해 현실 저편의 그 어떤 아름다고 위엄에 가득 찬 이상세계를 나타내고자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구룡에 모란당초문까지의 조각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흙심이 좋아야 합니다. 이런 흙은 자주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현재까지 이런 문양을 보이는 청자는 이것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 정도밖에는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청자양각모란당초용문 과형매병, 높이 37.9cm 국립중앙박물관
그런데 옥에도 티가 있다고 흠이 있습니다. 출토 당시의 파손입니다. 능화창 하나가 깨어졌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제짝이 거의 남아있어 본래의 위엄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입니다.(참고로 참외형 골 파기와 양각 문양이 결합된 것은 12세기 중에서도 연대가 올라가는 수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