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오조(五爪)의 쌍용준은 입이 다소 높고 좁아져 있으며 끝을 두껍게 마무리해 굳고 단단해 보인다. 몸통 상반부는 둥근 구형(球形)으로 팽창하는 양감을 나타내고 있으며 상대적으로 하반부는 급하게 좁아들어 전체적으로 하체가 빈약하다는 인상을 준다.
그림 1. <백자청화쌍용준> 조선후기 18세기, 높이 59.0㎝, 개인소장
용의 자세는 앞서 세 번째 국화반점을 얼굴에 찍은 용에 비해 더 비대해졌으며 큰 머리가 뒤로 늘어지면서 앞가슴이 앞으로 돌출되어있는 모습으로 표현돼있다. 육중해 보이는 용의 몸집을 몸통 전면에 꽉 차게 그려서 주변의 빈 공간이 좁아졌기 때문에 빈 공간에 넓게 펼쳐 그리던 십자형 구름과 쪽 구름들은 상대적으로 축소되어 나타나고 있다.(그림 1)
용의 부릅뜬 눈은 전방의 위쪽을 주시하고 있지만 전체적인 모습에서는 용트림하면서 앞으로 전진하는 저돌적인 분위기는 보이지 않는다. 아마 용그림 전반에서 나타나는 장식적 요소들 예컨대, 큰 얼굴과 입 주변에 솟은 가시수염, 날카롭고 가지런한 이빨, 살집이 많고 큰 주먹코, 완전히 뒤로 쓸어 빗은 머리갈기, 박쥐의 귀 같이 뾰족하고 큰 귀, 곡선적인 예쁜 뿔 같은 요소들 등 부분 부분에 장식성이 강조되면서 오히려 전체를 관통하는 힘 있고 근엄한 모습까지는 보여주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그림 2-1, 그림 2-2)
그림 2-1. 그림 1의 용머리 부분 그림 2-2. 그림 1의 등, 허리 부분
네 번째 단계의 오조룡(五爪龍)이 앞에서 본 다른 용들과 특별히 구별되는 요소는 앞발 무릎으로부터 나오는 서기(瑞氣) 즉 영기(靈氣)를 짧게 그려 넣은 것이다. 원래 오조룡의 앞발에 보이는 서기는 모두 무릎을 지나 머리 위까지, 뒷목 위의 하늘까지 신비한 힘을 발휘하면서 강력한 부력(浮力)으로 작용하며 육중한 몸집의 용을 날아오르게 만드는 기능을 하고 있었다.(그림 3-1)
그림 3-1. <백자청화쌍용준> 조선후기 17세기, 높이 57.0㎝, 크리스티(2011년)
그런데 네 번째 용은 앞발의 서기가 무릎 바로 위에서 끊어지고 더 이상 위로 오르지 않는다.(그림 3-2) 이렇게 짧고 미약한 서기로 인해 부력이 약해졌기 때문에 왼쪽 앞발을 밑으로 내려 뻗어 땅을 차고 도약하는 모습으로 표현되고 말았다.(그림 4)
그림 3-2. 그림 1의 앞발 서기 부분 그림 4. 그림 1의 앞발과 검형연판문
종속문양 띠의 변화도 네번째 단계 쌍용준에서 눈에 띄는 요소이다. 쌍용준의 목 부분에 그린 당초문 띠가 사라지고 몸통 하반부에서 검형(劍形) 연판문 밑을 장식하던 화판문을 생략하거나 사조나 삼조의 중형 용준의 경우 검형 연판문까지 생략하고 단순 여의두문으로 대체하는 등의 단순화 현상이 본격적으로 나타나면서 용준 고유의 위엄과 절대성은 약화되는 것 으로 보인다.(그림 5)
이제까지 보아 온 네 단계의 쌍용준은 17~18세기에 제작된 작품이 대상이다. 물론 19세기에 다양한 문양 소재들을 포함하면서 변화하는 용준들을 별도로 구분할 수 있지만 쌍용준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이 글에서는 제외했다. 그리고 중형, 소형의 사조, 삼조의 작은 용준의 경우도 제왕의 오조룡의 정통성을 먼저 규명하려는 이 글의 목적을 위하여 제외했다.
그림 5. <백자청화쌍용준(4조)> 조선후기 18세기, 높이 42.0㎝, 경기도자박물관
현존하는 조선후기의 대형 청화용준은 모두 오조용(五爪龍) 두 마리를 그려 넣은 것이다. 짧은 목 옆에는 당초문 띠를 두르고 목 밑에 큼직한 여의두문 띠를 그려 화면이 될 몸통 전체에서 상단을 구획한 후 몸통의 하반부에 검형의 연판문 띠를 그림으로써 중심 화면을 마련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필요에 따라 검형 연판문 띠 밑에도 장식적인 화판문이나 여의두문을 넣기도 하지만, 가장 필수적 요소는 당초문, 여의두문, 검형연판문으로 두른 띠라고 볼 수 있다. 사조나 삼조의 용, 또는 철화로 그린 용준에서 검형연판문 띠가 거의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대형 쌍용준을 더 크고 웅장하게 보이기 위하여 검형연판문 띠를 그려 넣었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 양상은 조선후기 17~18세기 용준들이 첫 번째 단계인 머리 갈기를 앞으로 빗어 올리고 얼굴에 쌀점을 찍은 쌍용준에서 두번째로 국화반점의 얼굴과 삼각형 앞니를 한 쌍용준, 그리고 세번째인 머리 갈기를 양쪽으로 가른 쌍용준을 거쳐 네 번째인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머리갈기를 뒤로 빗고 장식성이 강조된 쌍용준의 모습으로 변화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지금까지 쌍용준의 편년과 관련하여 알려진 자료가 전혀 없기 때문에 위에서 지적한 네 단계의 쌍용준이 제작된 시기를 분명히 지적할 수는 없지만, 첫번째 단계의 쌍용준은 17세기에 가깝고 네번째 단계는 18세기중기 분원리 분원으로 정착한 이후 안정적인 생산체계로 들어선 이후라는 추측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5. 맺음말
조선백자 가운데 높이 60㎝에 육박하는 대형의 기명은 용준과 백준(白樽) 뿐이다. 이 가운데 백준은 청화재료의 수급이 어려웠던 기간에 임시방편으로 가화를 그려 사용하거나 백준 그 자체로도 사용했던 것이기 때문에 이 백준 역시 기능적으로는 용준의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최대 규모의 조선 백자는 쌍용준(雙龍樽)인 셈이다.
대형 용준에는 항상 발가락이 다섯개인 오조(五爪)의 쌍용도(雙龍圖)를 그려 넣었다. 용의 자세가 우향 또는 좌향한 것으로 볼 때 좌우에 배치하기 위한 배려였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비공개 개인소장품의 경우 한 세트가 분명한 한 쌍이 우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해진 규칙은 없었던 것 같다.
쌍용준의 밑 부분에는 항상 검형 연판문이 그려지는데, 육중한 규모의 둥근 위 몸통을 높이는 가시적 효과가 있기 때문에 대형에만 적용되었던 특별한 배려같아 보인다.
분원에는 대형의 백준을 만들만한 기량은 충분했던 것 같다. 그간에 기록에서 백준 제작에 관한 문제점이 제기되지 않았으며, 화원 파견도 문제될 이유는 없었던 것같다. 용준 제작에 문제가 되었던 것은 중국에서 수입하는 회청 재료에 있었다. 회청은 국내외 사정이 어려울 때에도 구하려는 노력이 경주되었다. 왕실의 대의명분과 제왕의 위엄을 상징하는 푸른색으로 그린 쌍용준은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임진왜란의 와중이던 몇 년을 제외하면 푸른 쌍용준을 만들려는 노력은 변함없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글은 17세기가 청화 쌍용준의 공백기라는 선입관을 갖게 한 몇 가지 요소들을 검토하는데서 시작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17세기에 가화(假畵)를 쓰고 민간에서 구해오는 구차한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청화 쌍용준은 제왕의 권위를 위해서 절대 필수 사항이라는 분명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고, 청화재료 구입 즉시 쌍용준이 제작이 재개되었다는 가정을 하기 이른 것이다.
필자는 그간 18세기 제작으로 논의되어 온 쌍용준에 대해 17세기 이른 시기부터 시작되었을 가능성을 검토하고자 하였는데, 여기에는 1998년 공개된 이병창 박사의 기증품으로 오사카동양도자미술관에 소장된 쌍용준과 프랑스 국립도자박물관소장의 쌍용준 그리고 2003년에 공개 전시된 것으로 마주보는 쌍용도로는 유일한 국립중앙박물관소장품, 특히 2011년, 2012년에 열린 크리스티 경매에 출품된 두 점 쌍용준의 검토 과정에서 조선백자의 근간으로서 쌍용준에 대한 본격적인 검토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제왕을 상징하는 쌍용준은 위엄 있으면서 사치하지 않는 조선왕실의 미의식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도자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당연히 모든 백자 제작에 방향을 제공하고 모델이 되었을 것이 분명하며, 따라서 쌍용준에 대한 관심은 백자 전반에 대한 관심의 중심축으로 작용할 것으로 믿는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