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조선후기, 17세기의 철화용준(鐵畵龍樽)
조선 왕실은 처음부터 푸른 청청(淸靑)의 색으로 그린 5조의 쌍용준을 선택했다. 임진왜란 이후 국가 재건을 위한 절박한 기간에 부득이 백준(白樽) 위에 가화(假畵)로 쌍용도를 그리거나 민간이 보유한 용준을 받아쓰는 구차한 형편에서도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석간주(石間朱) 철화로 용준을 만들지는 않은 것이다. 아마 철화의 검붉은 색이 조선 사대부의 정점에 있는 왕의 권위와 동아시아 세계에서 주류 국가인 조선의 위신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판단을 하였던 것 같다.
그런데 인조12년(1634)에 외국사신을 접대하는 의식인 빈례(賓禮)에서는 철화로 그린 용준을 썼던 사실이 확인된다. 그것도 ‘가화가 쉽게 벗겨지는 등 실용성이 없어’임시방편으로 철화를 썼다는 것이며, 사옹원은 실용적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철화용준을 제작하고 의식을 치른 후 그러한 사실을 왕에게 보고한 바 있다.1) 아마 당시 빈례의 주체가 왕이 아니었기 때문에 붉은 철화용준을 쓴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1634년 이전에 제작해 사용한 철화용준에 대해서는 미리 보고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림 1-1 <백자철화용준> 17세기전기 높이 41.5㎝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림 1-2 <백자철화용준>의 부분
이러한 경위로 석간주로 운룡도를 그려 넣은 철화용준이 국가적 의식에 공식 등장한 것을 알 수 있으며 당시 사옹원 분원인 광주 상림리(1631-1636년 활동)와 선동리(1640-1649년 활동) 등의 가마터에서 17세기 전기에 제작된 철화용준의 신뢰할 수 있는 자료들이 발견돼 인조12년의 기록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2)(그림1-1,2)
17세기 전기에 속하는 철화용준은 대부분 3, 4개의 발톱을 가진 용 한 마리를 그린 것으로 높이 40㎝ 내외의 중형으로 제작되고 있었다. 조형 요소와 제작기술 수준에 있어 전통을 계승하면서 숙련된 솜씨를 보이고 있는 점에서 17세기 후기의 철화용준과 어느 정도 구분이 가능하다.
앞서 소개한 『세종실록』「오례의」와 『국조오례의 서례』에 실린 그림 가운데 용준의 형태가 각각 다르다는 사실은 이미 확인하였다. 우선 이들 두 가지 형식을 양감이 크고 풍만한 A형식과 키 크고 늘씬한 B형식으로 구분이 가능하여 각각의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런데 A형식의 철화용준 가운데 17세기 전기의 특징을 나타내는 사례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물론 16세기로 추정되는 오사카동양도자미술관 소장의 <백자 청화용준>의 존재를 염두에 두면 17세기 전기에 제작된 철화용준의 존재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만 말할 수는 없다. 단지 현존하는 A형식의 용준에는 17세기 후기의 특징인 변형된 운룡도를 자유분방하고 소략한 필치로 전면을 꽉 채워 그려 넣은 것이 여러 점 발견되지만 17세기 전기의 특징을 보이는 용준은 확인되지 않는다.
잘 알려진 보스톤미술관의 <백자철화 경술(庚戌)명 용준>(1670년)과 같이, 어깨와 굽 주위에 연판문대과 같은 종속 문양을 생략하고 용머리를 구름 속에 감추거나 또는 발가락을 하나, 둘, 때로는 발과 발가락을 구름으로 가려 나타내지 않은 경우들이 모두 A형식에 철화가 적용되기 시작한 17세기 후기에 나타나는 작품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그림 2-1 <백자철화용준> 17세기전기 높이 45.8㎝ 이화여대박물관
그림 2-2 <백자청화용준> 16세기 높이 34.5㎝ 오사카동양도자미술관 소장
그러나 A형식의 경우와 달리 B형식 철화용준들은 17세기 전기의 특징을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대표적 작품들이 남아 전한다. B형식으로 분류되는 키 큰 용준들은 석간주 철화로 3조의 용 한 마리를 그려 넣는다. 목 밑 어깨의 문양띠는 앞서 오사카동양도자미술관 소장의 <백자청화용준>에 보이는 장식적인 변형 연판문에 비해 단순화된 연판문 띠를 넣고, 굽 주변에 둘린 버들잎 같이 짧고 뾰족한 모습의 연판문 띠도 크게 변화시켜 거치문 같이 나타내거나 또는 둥근 파도문 띠로 나타내기도 한다.(그림2-1)
그림 3-1 <백자철화용준> 17세기전기 높이 47.6㎝ 서울 개인
그림 3-2 <백자철화용준>의 부분
물론 전체적인 용 그림의 구성과 비례는 청화로 그린 용에 비해 세련된 면모를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용의 표정은 위엄 있으며 여의두형의 돼지 코, 흩날리는 앞머리와 턱수염, 힘 있게 뻗은 발가락의 모습, 등지느러미 안에 보이는 가시, 윤곽선이 강한 풍성한 구름 등과 같은 요소들은 앞서 16세기로 추정하는 오사카동양도자미술관 소장의 <백자청화용준>(그림2-2)에서 보는 용 그림을 연상하게 된다. 청화로 그린 용 그림이 정통화법을 훈련받은 도화서 소속 화원의 솜씨라면 철화로 그린 용은 화원의 그림을 따라 그린 미숙하지만 진지한 화공(畵工)의 솜씨라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다.(그림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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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승정원일기』 인조12년(1634), 5월18일 참조.
2) 철화백자 제작 흔적이 확인된 분원 가마터에 대한 글은, 장기훈, 앞의 논문, p. 96-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