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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왕의 위엄 백자 쌍용준 4 - 위계 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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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용준의 용도와 위계질서

조선왕조는 엄격한 계급사회였기 때문에 그릇(器皿)의 사용 주체와 용도, 규모, 내용 등에 대해서 계급에 따른 엄격한 질서가 있었다.1) 최고의 용준인 오조용(五爪龍)은 국왕 전유의 의기(儀器)로 『국조오례의서례』에 구체적인 용도와 조형 의장에 관한 내용이 기록돼 있다. 
국왕이 주체가 되는 종묘와 사직에 제사 지내는 길례(吉禮)의 의기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백자 준항아리에 오조용을 그려 놓아 최상의 지위와 최고 규모의 의기로서 오조 용준이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림 1-1 <백자소문준> 15세기 호암미술관
그림 1-2 <백자청화용준> 17세기 높이 42.8cm 국립중앙박물관


앞서 『세종실록』「오례의」나 『국조오례의서례』의 편찬 목적이 왕실과 국가의 막중지사인 오례의의 실행 기준을 삼아 변하지 않고 온전히 계승하기 위함에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때 정해진 오조용준의 조형의장은 조선왕조 전기간 동안 계승되면서 새로운 용준을 만들 때마다 기준이 되었을 것이다.(그림 1참조)

조선백자의 상징인 용준은 사용 주체의 지위와 계급 질서에 따라 규모를 포함하여 세부 내용에 분명한 차등이 존재하고 있다. 앞서 오례의 길례와 가례에 이은 연향 의식에서 군왕의 앞에는 오조용을 그린 대형 준을 두고, 세자는 사조용(四爪龍)을 그린 중형의 준을 사용하며 공주 이하는 문양을 넣지 않은 백준(白樽)을 쓰도록 정해 놓고 있다. 이러한 사실에 미루어 짐작하면 왕실 내에서는 상하 차등뿐만 아니라 빈례(賓禮)나 군례(軍禮), 흉례(凶禮)의 경우에도 분명한 기준이 따랐을 것으로 생각된다. 

예컨대, 청화백자의 제작이 활발하지 않았던 조선 초기에는 외국사신의 접대 의식인 빈례에는 청화로 그린 용준을 사용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연산군 8년(1502년) 왕이 공주에게 용준을 하사한 사건이 알려지면서 조정에서는, 중국 사신에게도 사용하지 않던 용준을 공주에게 하사하는 일은 사치의 폐단이며 앞으로 용준의 제작과 공급이 용이해진다면 외국사신을 위한 빈례 의식에 공주의 경우 보다 먼저 용준을 사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된 바 있다.2)
이 사건 이후 청화백자 용준의 제작과 공급이 원활해지는 상태가 되었을 때 중국사신 등 외빈을 맞는 빈례 의식에 백준 대신 청화용준이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아졌을 것이다. 

빈례에 쓰는 용준 관련 기사는 임진, 병자 양란을 겪은 이후 국내 사정이 궁핍해졌을 때 다시 나타난다. 인조 12년(1634년)에는 사신 접대에 쓰는 용준을 만들 때 청화를 구하기 어려워 부득이 가화(假畵)를 사용했는데 운반할 때 그림이 벗겨지고 불편하여 (구하기 쉬운)석간주로 그렸다는 기록이 있다. 3)


  
그림 2-1 <백자철화용준> 17세기 높이 42.0cm 국립중앙박물관
그림 2-2 <백자철화매죽문준> 17세기 높이 41.3cm 국립중앙박물관


이 내용은 연산군 8년 이후 어느 시기부터 빈례에 청화용준이 사용되었으나 전란과 명・청 교체기를 잇는 불안정한 국내외 정세 속에서 불가피하게 가화를 사용했던 사실과, ‘가화 용준을 쓸 때 그림이 벗겨지는 등 불편함’으로 인하여 회청 대신 차선책으로 석간주로 용준을 만들었던 당시의 정황을 설명해 주고 있다.(그림2 참조)
 
그러나 빈례에 쓰는 용준에 석간주를 쓰기 시작한 후에도 왕실은 석간주를 쓰지 않고 전례에 따라 오직 가화(假畵)를 선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인조의 계비인 장열왕후 책봉을 위한 가례(1638년)에 쓸 용준의 경우에도 당시 왕후의 지위에 맞는 준비된 용준이 없어 갑자기 제작할 수 없고 사옹원에 보관되어 있던 대형 용준을 내용(內用)으로 쓸 수 없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백준에 가화로 용 그림을 그려 사용한 사실 등에서 용준의 질서가 매우 엄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4)

사실 임진왜란 이후 절박한 국내외 상황 속에서 대형 용준 제작은 어려운 일이었다. 광해군 10년(1618년)에 왕실 의례에 쓸 용준이 없어 민간에서 용준 한 쌍을 구해 썼던 일이나, 유실된 용준의 뚜껑을 만드는 일에 왕이 직접 관여한다거나 하는 사례들은 왕실에서 용준의 절대성을 설명하는 내용들이다. 광해군 11년 어렵게 수입해 온 회청으로 청화용준을 제작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필자의 견해는 조선왕실에서 청화용준이 갖는 절대성을 염두에 둔다면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본다.5)

회청(回靑)은 중국에서 생산되는 채료(彩料)로서 국내 생산이 불가능한 품목으로 오직 왕실에서 화원을 파견해 무역을 통해 구해와 용준을 만드는 용도에만 사용한 특별한 것이었다. 당연히 빈례 등과 같은 왕실 이외의 행사에서 화원이 회청으로 그린 청화용준을 쓴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현재 남아 전하는 철화용준의 대부분이 재질 및 제작 수준이 청화용준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으며, 또한 정통 화법을 교육받은 공필(工筆)의 화원(畵員) 솜씨라기보다 장식 문양에 익숙한 분원 소속의 화공이 그린 ‘숙련되었지만 표현은 미숙한’ 그림이라는 점에서 청화용준과 철화용준에 나타난 엄격한 위계질서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6)

  
그림 3-1 <백자철화‘진상다병’병> 18세기 높이 39.5cm  해강도자미술관
그림 3-2 <백자소문병> 18세기 높이 38.4cm 서울 개인


영조는 왕세자 기간에 사옹원(司饔院) 분원의 최고 책임자인 도제조(都提調)를 지냈다. 이때 그는 분원백자 진상품의 유출을 막기 위해 ‘진상다병(進上茶甁)’네 글자를 석간주로 쓰라고 조치하는 등 분원 백자 전반에 대해 높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세자였다.(그림3 참조)7)
그리고 삼십 여 년 지난 후 가례 진연에 쓸 용준 제작을 위해 화원을 보냈던 옛 기억을 회상하면서, “당시에는 그림 그린 그릇(畵器)에 석간주를 썼으나 지금 회청으로 화기를 그리는 데 이는 사치풍조”라고 하여 용준 이외에 일절 금지시키는 명을 내린 바 있다. 8)

이 내용은 영조가 화기(畵器)와 화용준(畵龍樽)에 쓰는 채색 재료와 화원의 임무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을 의미하며, 왕실의 체통과 대의 명분을 위해 청화용준의 정당성을 재천명하고 민간에서 회청 화기를 쓰는 일은 사치풍조로서 엄금해야 한다는 일관된 입장을 갖고 있음을 보이는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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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조는 왕과 세자의 그릇을 섞어 쓴 사례에 대해, ‘야인(野人)과 다를 바 없다’고 비판하면서 위계에 의한 상하 질서에 따라 쓰는 그릇에 차등이 있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세조실록(世祖實錄)』권29, 8년(1464) 11월 30일 경신(庚申) 참조. 그릇의 위계질서에 관하여 훗날 『경국대전 주해(經國大典註解)』 형전(刑典), 백자(白磁)항에는, ‘白磁 御膳用白磁 東宮用靑器 禮賓用彩文器(백자 어선용백자 동궁용청자 예빈용채문기)’로 규정하여 상하질서를 분명히 밝혀 놓았다.  

2) 연산 8년(1502년) 임술 10월 29일에는, ‘연산군이 휘순(徽順)공주에게 … 승지 등이 왕에게 아뢰기를 … 일전에 중국사신이 올 때에도 사용하지 않는 화룡준(畵龍樽)을 공주에게 하사함으로 사치하는 폐단이 생길까 염려하는 …’는 내용이 논의되고 있다. 3) 인조 12년(1634년) 승정원일기, ‘사옹원 제조가 말하기를, 사신접대에 쓰는 화룡준(畵龍樽)은 가화를 사용하였으나 옮겨 다닐 때 그림이 벗겨지는 폐단이 있어 역관을 통해 구입하려했으나 여의치 못해 부득이 석간주로 그려 용준을 구워 사용하였으며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인조12년 5월 18일 참조.

4) 1638년 인조의 계비인 장열왕후(莊烈王后)의 책봉 가례(嘉禮)에 대한 내용으로,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16년(1638년) 10월21일조 참조. 신승인, 『조선후기 왕실연향용 백자화기연구(朝鮮後期 王室宴享用 白磁花器硏究)』(이화여대대학원 석사학위 청구논문, 2012), p. 23에서 재인용.

5) 광해군이 회회청(回回靑)을 구하라는 명을 내린지 몇 년 후 이홍규가 무역해 온 것을 치하하고 시상하라는 기사가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11년(1619) 4월17일에 실려 있으며, 이때 수입한 회청원료는 왕실의 용준제작에 우선적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6) 17세기 分院에서 철화용준이 제작되는 기간에 석간주를 써서 사군자 및 포도를 소재로 그린 畵員風의 그림이 일정부분 있는데, 아마도 回靑으로 용준을 그리기 위해 파견된 畵員이 별도로 석간주를 써서 그린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7) 영조는 1721-1724년간 왕세자로 있었다. 石間硃로 쓴 ‘進上茶甁’에 관한 내용은, 『承政院日記』648冊, 英祖3년(1727) 10월21일. 宋贊植, 李朝後期手工業에 관한 硏究(서울대학교출판부, 1973), p. 156에서 재인용 

8) 承政院日記』영조30년(1754) 4월29일 기록과 『英祖實錄』권82, 30년(1754) 7월17일 기록 참조. 
글/사진 관리자
업데이트 2024.11.20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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