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용준(龍樽)의 제작
제왕의 권위와 위엄을 상징하는 용준의 제작은 매우 중요하면서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 중 하나였다. 앞서 살펴본 15세기 전기에 제작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분청 상감쌍용 준>은 원나라말기 경덕진요(景德鎭窯)의 청화기법을 조선초기의 분청 상감기법으로 재해석해 응용한 것으로 용준을 향한 집념을 나름대로 실현한 사례로 볼 수 있다. 그런 과정을 거쳐 15세기 후반에는 청화기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할 수 있었으며 드디어 왕실에서 필요한 푸른색 청화로 그린 용준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15세기후반 당시의 분원(分院)소속 사기장(沙器匠)들은 대형 백준(白樽)을 만들 수 있는 기량을 이미 갖추고 생산 단계에 도달해 있었으며, 정통 화법으로 훈련을 받은 도화서 화원들도 항상 쌍용도를 그리기 위해 광주 분원으로 갈 준비가 돼 있었다.
도 1 <백자 청화운룡문 준-조각> 조선 15세기 경기도광주 우산리9호 가마터 출토
도2-2<백자청화매죽문준> 조선 15세기 높이41.0㎝ 호암미술관 국보219호
도2-3<백자청화매죽문준> 조선 15-16세기 높이35.0㎝ 오사카동양도자미술관
실제 화원이 운룡도를 그렸다는 기록은 대략 백년 간격으로 18세기중반 영조 시대까지 확인되고 있다. 이로(李魯, 1544-1598)의『송암집(松巖集)』에는 “융경(隆慶)4년(1570) 광주 분원에(…) 화공(화원?)을 데리고가 예부에 보낼 용준을 만들었다”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1709년 당시의 분원 실정을 기록한 이하곤(李夏坤, 1677-1724)의 『두타초(頭陀草)』에도 “지난해 대내에 (회청으로 그린) 용준을 바치니 내사에서 공인에게 면포를 상으로 주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어 광주 분원에 화원을 파견하는 목적이 바로 용준 제작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렇게 화원이 분원에 가서 용준을 제작하는 일은 18세기중반 영조시대까지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었다.
참고자료 1: 15세기에 제작된 여타의 용 문양
<금강산 유점사 동종> 조선 15세기 높이67.0㎝ 국립춘천박물관
영조는 1754년에 (왕실 이외에 일반에서) 청화백자를 남용하는 것은 사치라고 규정하고 용준 이외에 제작을 엄격하게 금지 시키고 있다. 그리고 왕세자 기간에 가례의 진연에 쓸 화룡준을 만들 때 회청 화원을 내려 보낸 일을 상기하면서, 화룡준 이외에 회청 그림을 엄금하라는 명을 내리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