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현(成俔, 1439-1504)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세종 때 어기(御器)는 백자를 쓰고 세조에 와서 채자(彩磁)를 섞어 썼는데 중국에서 회회청(回回靑)을 구해 준(樽)과 앵(罌), 배(盃), 상(觴)에 그리니 중국 것과 다르지 않았다’라는 15세기후기 백자와 관련한 글이 있다.
이 글만으로는 백자에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 알 수 없지만 기존에 알려져 있는 15세기 청화백자(靑畵白磁) 그림의 소재가 운룡(雲龍)이나 송(松)・죽(竹)・매(梅)나 연당초(蓮唐草) 위주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당시 성현이 본 그림 가운데 왕실을 상징하는 운룡도를 그린 용준이 포함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1)
이러한 추측은 1480년대에 제작했던 사옹원의 분원 우산리9호 요지에서, 용준의 입술에서 어깨를 잇는 부분의 조각 <백자청화 용준-조각>과 송・죽・매와 연당초를 그려 넣은 술잔 같은 소형 음식기 등이 출토돼 앞서 성현이 말한 ‘중국과 다르지 않은’청화백자 준과 앵, 배, 상 등 실례를 살펴볼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2)
1-1 <분청상감용준> 조선 15세기 높이 49.2㎝ 국립중앙박물관소장
1-2 <백자청화용준> 元 14세기후반 높이 44.5㎝ 영국국립박물관소장
운룡도를 넣은 대형 용준으로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은 국립박물관에 소장된 <분청 상감용준>(도1-1)이다. 이 <분청 용준>은 런던의 영국박물관 소장의 원나라 시대 <청화백자 용준>(도1-2)의 형식과 대체로 유사해, 국산의 청화백자가 시작되기 이전에 처음 만든 용준은 중국의 청화백자 문양을 본 떠 분청 상감기법으로 표현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용준을 향한 이 같은 제작 의지는 건국 이후 새로운 제도가 확립되는 세종 연간에 명 선덕제의 사여품으로 <청화 운룡백자 주해>(도2-2) 세 점이 1430년에 도입되면서 더 구체화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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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조선전기 청화용준이 확인된 예가 없어서 추측하기 어렵지만, 17세기 철화용준이 40~50㎝이며 18-19세기의 청화용준이 60㎝에 육박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광주 우산리9호 출토의 <청화 용준편(靑畵龍樽片)>은 50-60㎝에 이르는 대형 용준으로 추정할 수 있다. 우산리 9호에서 출토한 송, 죽, 매 및 연당초를 그려 넣은 <청화백자 편(靑畵白磁片)>은 배(盃)나 상(觴)과 같은 소형 기명(器皿)들이다.
2) 우산리9호 요지에서 동반 출토된 <백자청화 묘지편(白磁靑畵墓誌片)>에는 ‘사과(司果)’라고 하는 관직명이 쓰여 있는데, 이는 세조 12년(1466) 군제(軍制)를 오위(五衛)로 개혁하면서 정한 정6품 무관직의 명칭이다. 따라서 이 묘지의 상한은 1466년이 된다. 이화여자대학박물관, 『조선백자요지 발굴조사 보고전』(1993), p. 35. 1466년 이후 ‘임인(壬寅)’년은 1482년, 1542년, 1602년이지만 동반 출토된 <백자청화 용준편(白磁靑畵龍樽片)>이 명이 선덕연간(1426-1435)의 경덕진 청화백자에 그린 운용(도3-2)과 유사한 반면, 16세기후기의 특징을 보이는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의 <백자청화 용준>(도7-1)과는 상당한 차이를 느낄 수 있어 1542년 보다 1482년의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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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조선전기 청화용준이 확인된 예가 없어서 추측하기 어렵지만, 17세기 철화용준이 40~50㎝이며 18-19세기의 청화용준이 60㎝에 육박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광주 우산리9호 출토의 <청화 용준편(靑畵龍樽片)>은 50-60㎝에 이르는 대형 용준으로 추정할 수 있다. 우산리 9호에서 출토한 송, 죽, 매 및 연당초를 그려 넣은 <청화백자 편(靑畵白磁片)>은 배(盃)나 상(觴)과 같은 소형 기명(器皿)들이다.
2) 우산리9호 요지에서 동반 출토된 <백자청화 묘지편(白磁靑畵墓誌片)>에는 ‘사과(司果)’라고 하는 관직명이 쓰여 있는데, 이는 세조 12년(1466) 군제(軍制)를 오위(五衛)로 개혁하면서 정한 정6품 무관직의 명칭이다. 따라서 이 묘지의 상한은 1466년이 된다. 이화여자대학박물관, 『조선백자요지 발굴조사 보고전』(1993), p. 35. 1466년 이후 ‘임인(壬寅)’년은 1482년, 1542년, 1602년이지만 동반 출토된 <백자청화 용준편(白磁靑畵龍樽片)>이 명이 선덕연간(1426-1435)의 경덕진 청화백자에 그린 운용(도3-2)과 유사한 반면, 16세기후기의 특징을 보이는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의 <백자청화 용준>(도7-1)과는 상당한 차이를 느낄 수 있어 1542년 보다 1482년의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3)『국조오례의 서례(國朝五禮儀序例)』권2 가례조에는 『세종실록』오례의(五禮儀) 가례 준작조에 그려 넣은 명 선덕연간(1426-1435)의 경덕진용준 형태와 유사한 <백자청화 주해(白磁靑花酒海)>의 그림과 함께, 권1 길례조에는 ‘준(樽)’이라는 명칭과 주해에 ‘화룡사준(畵龍沙樽)’이라고 달아 놓았다. 그런데 이 화룡사준의 그림은 동국대박물관소장의 홍치명 화준(畵樽, 도4-2)과 유사한 형태에 전면에 꽉 차게 구름 사이에 오조룡도(五爪龍圖)를 그려 놓았다.
4)형태가 다른 두 종류의 용준들은 17세기 전반까지 제작되고 17세기 후반부터 서로 장점을 취하여 한 형태로 통합된 통합 양식이 나타나 18세기로 이어진다는 견해는, 장기훈, 앞의 논문, pp. 100-102 참조. 필자는 이러한 두 종류 형태의 용준이 15세기 후반부터 공존, 양립하여 왔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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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5세기 준형(樽形) 항아리 가운데 용문을 새긴 <분청 상감운룡준(粉靑象嵌雲龍樽)>이 49.7㎝, 송죽을 그린 <백자 청화송죽 홍치2년명 준(白磁靑畵松竹‘弘治二年’銘樽)>(1489)이 48.7㎝이다. 그 외에 조선전기 15-16세기 송, 죽, 매(연당초문을 포함하여)를 그린 대부분의 준형(樽形) 항아리는 높이 30~40㎝이며 조선후기 17-18세기에도 40㎝ 내외가 대부분이다.
물론 조선전기 청화용준이 확인된 예가 없어서 추측하기 어렵지만, 17세기 철화용준이 40~50㎝이며 18-19세기의 청화용준이 60㎝에 육박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광주 우산리9호 출토의 <청화 용준편(靑畵龍樽片)>은 50-60㎝에 이르는 대형 용준으로 추정할 수 있다. 우산리 9호에서 출토한 송, 죽, 매 및 연당초를 그려 넣은 <청화백자 편(靑畵白磁片)>은 배(盃)나 상(觴)과 같은 소형 기명(器皿)들이다.
2) 우산리9호 요지에서 동반 출토된 <백자청화 묘지편(白磁靑畵墓誌片)>에는 ‘사과(司果)’라고 하는 관직명이 쓰여 있는데, 이는 세조 12년(1466) 군제(軍制)를 오위(五衛)로 개혁하면서 정한 정6품 무관직의 명칭이다. 따라서 이 묘지의 상한은 1466년이 된다. 이화여자대학박물관, 『조선백자요지 발굴조사 보고전』(1993), p. 35. 1466년 이후 ‘임인(壬寅)’년은 1482년, 1542년, 1602년이지만 동반 출토된 <백자청화 용준편(白磁靑畵龍樽片)>이 명이 선덕연간(1426-1435)의 경덕진 청화백자에 그린 운용(도3-2)과 유사한 반면, 16세기후기의 특징을 보이는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의 <백자청화 용준>(도7-1)과는 상당한 차이를 느낄 수 있어 1542년 보다 1482년의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2-1 <白磁靑花酒海>圖 『세종실록』오례의, 嘉禮尊爵圖(1454년)
2-2 <백자청화용준> 宣德年間(1426-1435) 높이 52.0㎝ 일본 이데미츠미술관
이 <청화 주해>는 세종시대에 중요한 의기(儀器)로 존중되다가 『세종실록』오례의(1454) 가례 준작조(嘉禮尊爵條)에 그려 넣은 도면 <백자청화 주해(白磁靑畵 酒海)>(도2-1)의 모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매우 유사한 도면이 1474년에 간행된 『국조오례의 서례(國朝五禮儀序例)』에도 실려 있어 조선왕실의 정통성 추구와 용준에 대한 확고한 입장을 재천명했다는 생각이 든다.
『국조오례의 서례』에는 앞서 청화주해와 다른 형태의 도면이 <준-화룡사준(畵龍沙 尊)>(도3-1)이란 명칭으로 실려 있다. 이 새로운 형태의 화룡사준은 중국 백자에는 찾아보기 어려운 형태로 아래쪽에 계단 같은 높은 굽을 받친 동국대학교박물관 소장의 <백자 청화송죽 홍치2년명 준(白磁靑畵松竹弘治二年銘樽)>(국보176호, 1489년, 도3-2)과 기형 및 문양 배치가 유사하며 종속문양 없이 전면에 꽉 차게 오조(五爪)의 운룡도를 그려 넣었다는 점 등에서 중국과 다른 새로운 용준이 이미 조선에서 별도로 제작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작품이다. 3)
3-1 <畵龍沙樽>圖 『국조오례의서례』 권1,吉禮條(1474년)
3-2 <백자청화송죽문준>‘弘治二年(1489년)’높이48.7㎝ 국보176호 동국대학교박물관소장
『세종실록』오례의(1454)와『국조오례의 서례(1489)』에 실은 도면으로 본 두 종류의 용준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지금 알 수는 없지만 풍만한 양감의 중국 선화연간의 용준 계통 보다 전반적으로 늘씬하고 준수한 형태의 동국대박물관의 화준(畵樽)으로 본다면 조선 15세기 용준의 규모가 더 컸을 것으로 추측된다.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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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5세기 준형(樽形) 항아리 가운데 용문을 새긴 <분청 상감운룡준(粉靑象嵌雲龍樽)>이 49.7㎝, 송죽을 그린 <백자 청화송죽 홍치2년명 준(白磁靑畵松竹‘弘治二年’銘樽)>(1489)이 48.7㎝이다. 그 외에 조선전기 15-16세기 송, 죽, 매(연당초문을 포함하여)를 그린 대부분의 준형(樽形) 항아리는 높이 30~40㎝이며 조선후기 17-18세기에도 40㎝ 내외가 대부분이다.
물론 조선전기 청화용준이 확인된 예가 없어서 추측하기 어렵지만, 17세기 철화용준이 40~50㎝이며 18-19세기의 청화용준이 60㎝에 육박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광주 우산리9호 출토의 <청화 용준편(靑畵龍樽片)>은 50-60㎝에 이르는 대형 용준으로 추정할 수 있다. 우산리 9호에서 출토한 송, 죽, 매 및 연당초를 그려 넣은 <청화백자 편(靑畵白磁片)>은 배(盃)나 상(觴)과 같은 소형 기명(器皿)들이다.
2) 우산리9호 요지에서 동반 출토된 <백자청화 묘지편(白磁靑畵墓誌片)>에는 ‘사과(司果)’라고 하는 관직명이 쓰여 있는데, 이는 세조 12년(1466) 군제(軍制)를 오위(五衛)로 개혁하면서 정한 정6품 무관직의 명칭이다. 따라서 이 묘지의 상한은 1466년이 된다. 이화여자대학박물관, 『조선백자요지 발굴조사 보고전』(1993), p. 35. 1466년 이후 ‘임인(壬寅)’년은 1482년, 1542년, 1602년이지만 동반 출토된 <백자청화 용준편(白磁靑畵龍樽片)>이 명이 선덕연간(1426-1435)의 경덕진 청화백자에 그린 운용(도3-2)과 유사한 반면, 16세기후기의 특징을 보이는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의 <백자청화 용준>(도7-1)과는 상당한 차이를 느낄 수 있어 1542년 보다 1482년의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4)형태가 다른 두 종류의 용준들은 17세기 전반까지 제작되고 17세기 후반부터 서로 장점을 취하여 한 형태로 통합된 통합 양식이 나타나 18세기로 이어진다는 견해는, 장기훈, 앞의 논문, pp. 100-102 참조. 필자는 이러한 두 종류 형태의 용준이 15세기 후반부터 공존, 양립하여 왔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