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자에 코발트 안료로 그림을 그린 청화백자는 명나라 청화백자의 영향을 받으며 조선시대 초기부터 다수 제작됐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인해 코발트 수입이 어려워지면서 청화백자의 맥은 잠시 끊기게 된다. 대신 등장한 것이 산화철을 안료로 사용한 철화백자였다. 그 후 청화백자는 사회가 안정되고 경제적으로 발전하는 18세기 이후에 다시 등장해 조선 말기까지 활발하게 제작됐다. 따라서 청화백자에 그려진 그림 문양은 각 시대마다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인다. 상상 속의 동물인 용이 구름 속에 떠있는 운용문은 조선시대 내내 많이 그려진 문양이다. 하지만 시대에 따라 표현의 변화를 읽을 수 있어 이것 하나만으로도 조선시대 청화백자의 흐름을 짐작해볼 수 있다.
백자청화 운룡문 항아리(白磁靑畵 雲龍文 壺) 明 선덕연간(1426~1435) 높이 48.3cm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구연부에 구름문양, 굽 쪽에 연판문이 그려져 있다. 몸통에는 여의두 문양처럼 생긴 구름 사이에 떠있는 용이 그려져 있다. 코발트 안료의 색이 짙은 것은 철분이 많이 포함됐기 때문이다.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청화 백자에도 이처럼 검정에 가까운 짙은 감색의 청화 백자가 있다.
백자청화 운용문 항아리(靑畵白磁 雲龍文 壺) 16~17세기 높이34.5cm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종속 문양이 꽉 들어찬 항아리로 주둥이 부분(口緣部)에는 당초 문양을, 어깨에는 변형된 연판문(蓮瓣文,연꽃잎을 연속적으로 펼쳐놓은 문양)을 둘렀다. 그리고 그 속에 다시 화려한 보주문(寶珠文)을 그려 넣었다. 굽 쪽에는 불꽃처럼 보이는 변형 연판문을 둘렀고 그 아래에 또 구슬 문양을 그렸다. 용무늬는 얼굴 부분이 명대의 것보다 회화적이지만 몸통은 조금 딱딱한 느낌을 준다. 여의두 문양을 변형시킨 구름 문양은 명나라 것과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청화백자 운룡문 항아리(靑畵白磁 雲龍文 壺) 18세기중반 높이 56.2cm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18세기 들어 다시 제작되기 시작한 청화백자는 먼저 과거의 사례를 충실히 재현하는 방향으로 부활했다. 이 항아리는 구연부와 어깨의 당초문양과 여의두문 그리고 굽 쪽의 변형 연판문과 여의두문양에서 16,17세기 청화백자 항아리의 모습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하지만 몸통에 그려진 용은 도안적인 성격에서 벗어나 허공을 자유롭게 날며 여의주를 가지고 노는 활달한 모습으로 표현돼 있다. 즉, 용 그림에서 초기보다 매우 회화적인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청화백자 운룡문 항아리(靑畵白磁 雲龍文 壺) 18세기중반, 높이 43.5cm 일본 고려미술관
어깨에 살짝 여의두문을 둘렀으나 주둥이와 굽 쪽의 종속 문양은 사라졌다. 대신 몸통의 공간이 넓어지며 여백이 많아졌다. 용 그림에서는 부릅뜬 눈과 떡 벌어진 발톱 그리고 흩날리는 수염과 갈기에서 자신감 넘치는 회화적 필치를 엿볼 수 있다. 허리 밑 부분의 이중선은 금사리 백자에 자주 보이는 처리기법이다.
백자청화 운룡문 항아리(白磁靑畵 雲龍文 壺) 18세기후반~19세기, 높이 37.8cm 국립중앙박물관
주둥이 벽의 당초문이 다시 되살아났으며 몸통이 시작되는 어깨 입구의 여의두문이 굽 쪽에도 반복되고 있다. 반면에 용이 날고 있는 구름 사이의 문양에 큰 변화가 보이는데 이제까지 만(卍)자처럼 열십자로 꺾이던 문양이 낱개로 분해되어 용 발밑에 떠있다. 또 용의 발톱도 이전 시기보다 더욱 도안화가 진행된 것으로 여겨진다. 전체적으로 문양의 전승이 불완전한 기억 속에 이뤄지고 있는 듯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