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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_2 조선시대 백자의 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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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내내 백자가 제작되었지만, 재료나 제작 기법을 살펴보면 시대별로 조금씩 특징이 다른 백자가 등장했다 사라졌다.

먼저 조선시대 들어 초기에 제작된 백자는 2가지 계통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고려청자의 전통을 계승한 연질(軟質) 백자이다. 다른 하나는 명나라의 백자 제조기법을 받아들여 발전시킨 경질(硬質)백자 계통이다. 연질이란 말 그대로 딱딱한 정도가 덜하다는 것으로 연질 백자는 태토 속에 들어있는 장석의 양이 다소 부족해 자화(磁化)가 덜 된 상태의 백자를 가리킨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연질 백자는 마치 석고로 도자기를 빗은 듯이 푸석푸석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두 번째는 명나라 백자의 영향 아래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경질 백자이다. 이는 좋은 백토를 사용하고 투명한 유약을 발라 높은 온도에서 구은 백자를 가리키는데 두드리면 쇳소리가 날 정도로 경도가 높다. 경질 백자는 조선 초기에 제작된 이래 사실상 말기까지 계속됐다.

초기의 경질 백자를 문양 면에서 보면 아무런 문양이 없는 순백자가 전체의 90% 이상을 차지한다. 대부분의 연질 백자에 상감 문양이 되어있던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그리고 명나라 청화백자의 영향을 받아 청화백자가 아주 약간 제작됐다. 한편 관요가 아닌 민간의 가마에서는 조선시대 들어 청자 제작기법의 연장선상에 있는 분청사기가 만들어져 널리 사용됐다.

백자의 흐름으로 보면 17세기 들어 백자는 뜻하지 않게 토착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두 번에 걸친 큰 전란의 영향으로 중국의 영향, 물자 수입이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가장 큰 타격은 중국을 거쳐 들어오던 아라비아산 안료, 즉 푸른색을 내는 산화코발트의 수입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따라서 큰 항아리에 푸른 색 안료로 용이나 매화, 대나무 등의 그림을 그려 넣어 궁중 행사에 사용하던 초기 청화백자는 더 이상 만들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푸른색의 코발트 안료 대신 붉은 색을 내는 산화철로 대체한 이른바 철화(鐵畵) 백자가 한동안 유행하게 됐다.

시기적으로 보면 이때는 중국 대륙에서도 명나라와 청나라가 교체되는 때이기도 했다. 당시 제작된 철화 백자는 명의 영향과는 무관한 조선적인 기형과 문양이 다수 등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조선적 분위기가 물씬한 철화 백자는 이후 사회가 안정되고 경제가 발전하면서 다시 찾아온 청화 백자의 시대로 인해 급속히 자취를 감추었다.

18세기 이후 조선 백자의 주류는 청화백자라고 말할 정도로 많이 제작되었다. 이때 재등장한 청화백자를 보면 궁중에 사용되는 대형 항아리 이외에 작은 항아리, 병 등과 같은 생활 용기에서 양반사회의 취미 용품인 문방구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가 제작됐다.

19세기에 들면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청화 백자가 더욱 유행했고 아울러 대량 생산을 위해 도안화된 장식적인 문양이 다수 등장한다. 이 당시 왕실은 물론 한양의 양반 사회 그리고 그 주변의 부유한 중인 사회를 포함한 광범위한 도자기 수요를 충당한 것은 관영의 분원 체제였다. 그러나 이 분원은 왕실 재정의 파탄 속에 1883년 민간에 불하되며 막을 내렸다. 이후 조선 말기의 도자기는 일부 이왕가미술품제작소 제작품을 제외하고는 전적으로 민간에 의해 제작되었다. 분원 이후, 즉 조선시대 말기의 도자기 제작상황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불명확한 점이 많다.


백자 항아리(白磁壺) 15~16세기 높이 31.6cm 국립중앙박물관


백자철화 호록문 항아리(白磁鐵畵虎鹿文壺) 17세기 높이 28.2cm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백자청화 매죽문 병(白磁靑畵梅竹文甁) 19세기 높이 21.1cm 호림미술관

편집 스마트K
업데이트 2024.11.13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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