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청사기는 고려의 상감 청자가 쇠퇴하면서, 다른 말로 바꾸면 대량 생산되는 과정에서 생겨난 도자기이다. 따라서 초기에는 태토가 조잡하고 두께가 두껍고 투박하며 색깔도 암록색을 띤 것들이 많다. 조선의 건국 초기에는 백자가 그다지 많이 제작되지 않아 대부분이 분청사기가 사용됐다. 학자에 따라서는 15세기초 조선에서 만들어진 도자기의 100개중 95개가 분청사기였다고도 설명한다. 그리고 또 이들 대부분이 상감문양이나 인화문으로 장식된 분청사기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조선의 사회적 기틀이 안정되는 15세기중반 이후가 되면 명나라 백자의 영향을 받아 적극적으로 백자를 만들게 되면서 분청사기 역시 고려 계통의 기술인 상감 기법이나 인화 기법이 쇠퇴하게 된다. 대신 겉모양으로 보아 백자와 닮아 보이는 귀얄 귀법은 크게 유행했다.
그리고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전반이 되면 왕실 도자기는 분청사기에서 완전히 백자로 바뀐다. 이 시기에 분청사기는 귀얄 기법이 사라지고 덤벙(담금) 기법에 의한 백자화가 나타난다. 특히 이 무렵 계룡산에서는 독특한 회화적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철화(鐵畵) 분청사기가 등장한다. 그후 1600년이 되면 분청사기는 완전히 맥이 끊기면서 백자의 전성시대가 된다.
분청사기 인화문 태항아리(粉靑沙器印花文胎壺) 15세기전반 높이 35.8cm 호암미술관
분청사기 귀얄문 발(粉靑沙器귀얄문鉢) 16세기 높이 14.8cm 국립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