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청사기는 조선 시대의 기록에는 나오지 않는 이름이다. 세종때 도자기자기소 사기소 그냥 사기와 자기를 혼용해 썼다. 일제 시대에는 주로 분청자(粉靑瓷)라고 불렀다. 청자에 흰 분을 발라 구운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분청사기는 원래 청자에서 출발한다. 청자 태토를 그대로 사용한 위에 백토로 분단장을 하듯이 분장(粉粧)을 하고 투명한 유약을 발라 구운 것이다. 따라서 분청자라는 용어도 틀린 용어는 아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사학자 고유섭 선생은 분청사기의 특징인 색깔을 유심히 관찰하며 보다 정확한 이름을 찾았다. 분청사기는 백토로 분장한 뒤에 문양을 나타낸 경우가 많은데 문양을 긁어낸 바탕에는 회청의 청자 바탕색이 그대로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砂器)라는 말을 찾아냈고 이를 줄여 분청사기(粉靑沙器)로 표기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분청사기란 이름은 이렇게 지어졌다.
분청사기가 탄생한 것은 고려의 상감청자의 몰락과 연관이 있다. 상감 청자에 문양을 넣는 일은 매우 복잡한데 고려후기 청자가 대량생산되는 시기를 맞아 문양이 대범해지고 간략해지기 위해서 새로운 제작 방법이 필요했다. 분청사기는 시기적으로 이때에 등장했다고 설명되는 것이 보통이다. 또 관영이었던 강진이나 부안 가마의 사기장들이 고려 왕조의 붕괴로 인해 전국에 흩어지는 과정에 제작 기법이 간소화되면서 탄생했다고도 한다.
분청사기는 청자 태토에 백토 분장을 했기 때문에 사기장들은 보다 투명한 유약을 찾아 나섰다. 전문가에 따르면 대개 청자 유약에 많이 쓰이는 소나무 재에 장석과 석회석, 점토를 섞어 썼다고 한다. 강경숙 교수의 『분청사기 연구』를 보면, 분청사기 유약실험에는 장석, 소나무재,점토를 25:5:2로 섞었을 때 가장 보기 좋은 분청사기색이 나왔다고 한다..
한편 일본에서는 인화문 분청사기의 일부를 가리켜 미시마(三島)라고 부른다. 미시마라는 말의 유래에 대해, 일본에서는 경상남도 거제도 일대의 섬은 조선시대에 삼도라고 불리웠는데 이곳을 통해 일본에 전해진 도자기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설이 있다. 또 한편에서는 일본 미시마 진자(三島神社)에서 만들어썼던 달력은 멀리서 보면 인화문 분청사기의 하단에 보이는 짧게 내려그은 문양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 설도 있다.
청자상감 국운문 편병(靑磁象嵌菊雲文扁甁) 13세기 높이 32.9cm 개인 소장
분청사기 상감조노문 매병(粉靑沙器象嵌鳥蘆文梅甁) 15세기전반 높이 33.0cm 호암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