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자양각 모란당초문 기와(靑磁陽刻 牧丹唐草文 瓦) 12세기중반 |
『고려사』에는 고려시대에 궁궐 지붕을 청자 기와로 이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러나 오랫동안 청자기와에 대한 것은 기록만 전할 뿐 이를 입증할 실물 자료가 발견되지 않았다. 1927년 일본인 학자에 의해 개성 만월대의 고려 궁궐터에서 청자기와 조각 하나가 발견된 적이 있을 뿐이었다.
그후 1964년과 1965년에 국립중앙박물관이 강진의 사당리 가마터를 본격적으로 발굴 조사하면서 수십 조각의 청자기와를 발견해내 고려사의 내용이 사실임을 재차 입증했다. 그리고 1990년 전후해 중국을 통해 북한의 개성에서 새로 발굴된 청자기와가 몇 점 국내에 전해지기도 했다.
기와는 물내려가는 골을 만들어주는 암기와와, 암기와를 이어주는 수기와로 나뉜다. 또 이런 암수 기와들이 처마 끝에서 마무리될 때 마구리처럼 막아주는 기와로 암막새기와와 숫막새기와가 있다. 청자기와 중 화려한 문양이 들어있는 것은 대개 이들 막새기와다. 막새기와에는 주로 당초문, 모란당문, 연화문 등이 사용됐으며 기법으로는 양각, 음각, 반양각 등 다양한 기법이 사용됐다.
참고로 『고려사』에서 청자기와에 관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세가 18권, 의종11년4월 병신조
「사월 여름 병신 초에 대궐 동쪽에 이궁이 완성돼 이름을 덕수궁, 천녕궁이라 했다.(...) 민가 50여 채를 허물어 대평정을 만들었고 태자에게 편액을 쓰게 했다. 대평정 곁에는 이름난 화초와 갖가지 과일 나무를 심었으며 고려의 진귀한 물건을 배치해 놓았다. 또 정자 남쪽에 연못을 파고 관난정을 세웠다. 그 북쪽에 양이정을 지었는데 청자(靑瓷)로 지붕을 이었다.」
(夏四月丙申朔, 闕東離宮成, 宮曰壽德曰天寧(...) 毁民家五十區, 作大平亭,命太子書額, 旁植名花異果, 高麗珍玩之物布列左右, 亭南鑿池, 作觀灡亭, 其北構養怡亭, 盖以靑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