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원 제작의 청화백자 초충문 쌍이편호(靑華白磁草蟲文雙耳扁壺)
18세기후반 높이18.0cm 국립중앙박물관
관요(官窯)는 말 그대로 관에서 운영하던 가마를 가리킨다. 신라 시대의 경우 관영 공방이 존재했는지 여부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는다. 고려시대는 건국 초기에는 각 지방의 호족들이 직접 청자 가마를 운영했다. 말하자면 사영(私營)이며 민간 가마였다. 하지만 국가의 기틀이 확립되고 제도가 정비된 광종에서 성종 무렵에는 강진에 국가가 관리하는 관영 가마가 운영됐다. 조선시대 역시 초기에는 사기를 제작하는 곳이 전국에 2백여곳 넘게 있으며 각지에서 왕실에 필요한 용품을 진상했다. 그러나 성종 초기인 1470년대 경기도 광주에, 왕실의 음식관련 업무를 관장하는 사옹원(司饔院)의 분원(分院)이 설치되면서 이곳에서 직접 왕실용 도자기를 굽는 관영 체제가 확립됐다.
지방가마 제작으로 여겨지는 백자철사 호로문 항아리(白磁鐵畵虎鷺文壺)
17세기후반 높이 30.1cm 오사카동양도자미술관
하지만 조선시대 내내, 지방에는 이와 별도로 지방의 수요를 충당하기 위한 민간이 운영하는 가마가 존재했다. 이들 가마에서 제작된 도자기는 태토의 수준이나 제작 기법면에서 분원 제작의 도자기보다는 그 수준이 많이 뒤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해학적이고 자연스러운 분위기와 멋은 관요의 제작품보다 한층 뛰어난 경우도 더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