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화가는 문인이면서 특히 그림에 재주를 보인 사람을 가리킵니다.
중국에서도 애초에 그림 그리는 일은 전문가 집단이 행하는 특수한 기능으로, 문인, 사대부와는 무관하다고 여겼습니다. 이런 생각이 바뀐 것은 문인관료사회가 정착하며 문인화론이 싹튼 송(宋)대부터입니다.
문인화론의 주장은, 그림에 담긴 생명력이 그림 그리는 사람이 지닌 교양, 학문에 좌우되는데 문인은 그런 점에서 직업화가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깔고 있습니다. 특히 명(明)대 들어 동기창이 남북이종론(南北二宗論)을 통해 문인화 우위론을 주장한 뒤로부터 그림은 문인이 갖춰야할 교양의 하나로 인식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중국에서도 애초에 그림 그리는 일은 전문가 집단이 행하는 특수한 기능으로, 문인, 사대부와는 무관하다고 여겼습니다. 이런 생각이 바뀐 것은 문인관료사회가 정착하며 문인화론이 싹튼 송(宋)대부터입니다.
문인화론의 주장은, 그림에 담긴 생명력이 그림 그리는 사람이 지닌 교양, 학문에 좌우되는데 문인은 그런 점에서 직업화가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깔고 있습니다. 특히 명(明)대 들어 동기창이 남북이종론(南北二宗論)을 통해 문인화 우위론을 주장한 뒤로부터 그림은 문인이 갖춰야할 교양의 하나로 인식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문인화론이 조선에 소개, 확산된 것은 17세기 후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무렵이 되면 시와 글씨 외에 그림도 문인들의 교양 중 하나로 손꼽히면서 그림을 잘 그리는 문인은 ‘시서화 삼절(三絶)’로 높이 칭송되었습니다.
심사정(沈師正,1707~1769), <방심석전산수도(倣沈石田山水圖)>, 종이에 담채, 1758년, 국립중앙박물관
그렇지만 그림을 천기(賤技), 즉 천한 기예로 보는 생각이 뿌리 깊게 남아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활동한 문인화가 관아재 조영석(趙榮祏, 1686-1761)은 그림 재주로 어진 모사의 감독에 임명됐으나, 이는 사대부가 할 일이 아니라며 이를 거절해 왕의 노여움을 산 적도 있습니다. 그는 또 자신의 그린 화첩 표지에 ‘남에게 보이지 말라. 이를 지키지 않으면 내 자손이 아니다’라고 적기도 했습니다.
조영석, <이 잡는 노승>, 종이에 담채, 23.9 ×17.0㎝, 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