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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상화] 조선시대 화가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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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시대 인물화는 인물의 특징만을 집어내어 풍자적으로 캐리커쳐를 그리기도 하고, 사진을 찍어 그림으로 변형하기도 한다. 하지만 조선시대 초상화는 터럭하나도 다르지 않도록 정확한 사실성을 바탕으로 하는 전신사조(傳神寫照)를 추구하였다.
조선시대 초상화는 왕을 그린 어진과 공신을 그린 공신 초상, 승려를 그린 진영, 일반사대부등 다양하게 그려졌다. 그 중에서 조선시대 화가의 초상화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인상 초상>  종이에 색, 58.0 x 33.0 cm, 국립중앙박물관 



이인상, <설송도> 종이에 먹, 117.0 x 53.0 cm, 국립중앙박물관   


이인상, <원령필첩> 당나라 가도의 「산중도사」中,  42.0 x 35.0cm, 국립중앙박물관

 

이인상은 지조와 절개가 높아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았으며, 자신의 뜻과 다르면 절대로 교유를 하지 않았던 완고한 인물이었다. 이인상의 작품은 대부분 깨끗하고 담백한 문인의 기운이 느껴지며 문인화가답게 글씨도 잘 써 이인상의 전서(篆書)는 동국(東國)의 제일이라는 찬사도 받았었다.
이인상의 초상화는 필자미상의 작품이라 누가 그렸는지는 알 수는 없으나 터럭 하나까지도 닮게 그렸던 옛 초상화의 전통을 생각해보면 문인화가답게 꼿꼿했던 이인상의 풍모가 얼굴에도 나타나는 듯 하다.

 

표암 강세황도 이인상과 같은 문인화가인데 자화상 및 초상화가 여러 점 남아있다.


강세황, <자화상>《임희수전신첩》, 종이에 담채, 직경 15cm, 국립중앙박물관


강세황, <자화상> 유지본(油紙本) 담채, 28.6 x 19. 8 cm, 강주진 구장


작자미상, <강세황 정면상> 지본담채, 50.9  x 31.5 cm, 국립중앙박물관


작자미상, <강세황 초상화> 지본담채, 50.9  x  35.1 cm, 동산방

 


강세황, <자화상> 견본담채, 88.7 x 51cm, 국립중앙박물관


이명기, <강세황 영정>, 견본담채, 145.5 x 94cm, 국립중앙박물관

 

강세황은 10대부터 명필로 이름을 떨쳤고, 뛰어난 그림 실력과 서화 감식안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형님이 과거에서 부정을 저지름으로 인해 평생 과거시험을 보지 않았고, 남인들이 관직에 오르지 못하면서 선비지만 벼슬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시서화 삼절(詩書畵 三絶)이었던 강세황이 공부를 많이 한 선비임이 알려지면서 61세 늦은 나이에 영조의 배려에 힘입어 관계에 진출하였다.
청나라 건륭제(乾隆帝)의 80세 생일 때 사신으로 중국에도 다녀오는 등 늦은 나이에 명예를 누렸던 인물이며 현재까지 강세황의 많은 작품이 남아있다.

 

추사 김정희가 그린 <세한도>가 유명한 작품이기는 하지만 김정희는 화가라기 보다는 대학자라고 할 수 있다.


깁정희, <자화상> 지본담채, 32.0 x 23.5 cm, 선문대학교박물관


허련, <완당선생초상> 초본과 정본, 지본담채, 51.9 x 24.7cm, 개인소장

 

김정희는 좋은 가문에서 교육 받으며 평탄한 삶을 살다가 말년에 모함을 받아 제주도로 유배를 다녀오게 되지만 유배 이후 추사체를 보여주게 된다.
금석고증학에 전념했던 김정희는 여러 제자를 둔 스승이었으며, 청나라에서 옹방강을 비롯한 학자들과 교분을 맺으며 이름을 떨쳤는데,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문자향 서권기(文字香 書卷氣)였다.
문자향은 글씨에서 풍기는 기운을 말하며, 서권기는 독서를 통해 얻는 지혜 등을 말한다.
즉 책을 많이 읽고 교양을 쌓아 인품을 맑게 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러한 예술관은 많은 영향을 미쳤다.
김정희가 제자들의 글과 그림에 대해 평한 기록을  제자들이 모아 엮어 『예림갑을록』이라는 책을 만들었는데, 김정희에게 품평을 받았던 제자 허련과 이한철이 그린 김정희의 초상화가 남아있다.
특히나 허련은 김정희의 애제자로 김정희의 제주도 유배시절 멀고 험한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갔을만큼 스승에 대한 존경심이 극진했기에 더욱 눈길을 끈다.

 

화가 본인이 자신의 모습을 그린 자화상 중 우리가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작품은 윤두서의 자화상이다.


윤두서, <자화상> 지본담채, 37.3 x 20.3cm, 해남종가      


<조선사료집진속>에 수록된 1937년 작품사진

 

윤두서는 조선 중기와 후기의 전환기에 살았던 인물로 20대 때 부모님과 아내, 친구의 상을 줄줄이 겪으며 서른 때부터 반백이 되었다고 한다.
자화상에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눈은 정신적인 면까지도 표현한 전신(傳神)을 보여주고 있는데 수염 한 올까지 치밀하고 정확하여 보는 사람에게 마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 작품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일단 강렬한 인상을 받게 되고 한편으로는 미완성 작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1937년에 이 작품을 찍은 사진에는 유탄으로 그려진 몸체의 표현을 볼 수 있다. 또 국립중앙박물관 연구팀이 분석한 결과 배채로 채색이 되어 있었으며 양쪽 귀까지 그려졌던 그림이라는 것이 밝혀진 바 있다.
지금은 유탄이 지워져 미완성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내면까지 표현한 정교하고 완벽한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다.

 

 

글/사진 관리자
업데이트 2024.11.13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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