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필담첩 2』에는 추사가 옹수곤에게 보낸 편지 초고 외에 옹방강에게 보낸 편지 초고가 함께 수록돼있다.
지금까지의 기록에 따르면 추사는 옹방강으로부터 3통의 편지와 1통의 별봉 편지를 받았는데,0) 본 필담첩의 이 초고는 옹방강이 보내준 편지에 대한 답장으로 보인다. 내용으로 볼 때 추사가 옹방강을 대면한 뒤 처음 받은 서신에 대한 답장으로 추측되는바, 1815년 1월 14일에 쓴 옹방강의 첫 번째 서신에 대한 답장일 확률이 높다.
자료의 형태로 보아 앞부분과 뒷부분이 결락된 아쉬움이 있으나 옹방강에게 보낸 편지로 처음 발견된 것이라는데 남다른 의의가 있다.
당시 조선의 빈약하고 편협한 학술 풍토를 토로하며 그에 대해 많은 가르침을 달라는 부탁과 함께 옹방강의 저서 부본을 보내달라는 간절한 요청이 특히 눈길을 끈다.
一自歸國以來, 理考肅具寸索, 虔叩崇禱, 而
心怵◘◘猥越, 亦恐敢瀆撓嚴畏
不敢◘◘齎愫. 每年中秋後一日, 先生慶辰,
焚香展像, 以寓◘◘之私而已.
千萬不自意本年正月廿●日,
蒙賜瑤圅四紙隷額一部, 寔爲庚辛以後初有
之事, 而況又辱之以先施!●…●
書敎數千百言,●…●字細如髮, 情詞懇至,
●●●●●●纖微, 則牛毛蠶絲,
宏巨, 則山海崇深, 不啻如耳提而面命也.
●…●
●…●
●…●●●是豈小子一人之幸而已, 東
土之●●◘昏啓蒙, 升之大明之一大樞紐也,
焉敢誣也! 第●●●●以經說之積,
有七十餘卷, 而●…●或輒有增刪, 不可輕易
付刻. 且當覓人, 尙未淸出淨本. 竊伏念先生
謙挹沖抑, 以大禹不自滿假之義,
體衛武不易由言之訓, 每晨●朝覈檢,●…●
不以丹黃爲勞. 此固耆年
盛擧, 後生洪福, ●小子何述焉! 然竊覸先生
之志, 在於後世, 而不在於今
日. 如小子者, 是今日之人, 若以後世爲念, 則
當從今日爲始. 古人之著書垂
訓, 固不止於今日之計, 然或列之學官, 或行
于當世者, 皆自其當世始也. 且見
近日●●門戶多端, 戈矛四起, ●…●立言於
◘(……)◘, 以是爲憂. 然間
焉●◘平者, ●…●. 是以鄭康成之後, 有王
輔嗣, 嗣而
後又有如顧·閔·王·顔, 互相揚抑程朱大儒也.
至於近世之毛大可·
陳啓源·戴東原, 而叫呶極矣. 雖欲務歸公平
息訟止鬪, 人無
得而間焉, 而其不可得也定矣. 惟觀鄭之於王
何如, 程朱之於毛․陳諸 人又何如而已, 惟先
生垂察焉.
至若無力謄寫, 則小子之惑, 滋有甚
焉. 蘇門學人, 尙●有林◘人陳◘求數人, ●
●●亦復何難之有? 如不爾, 則
小子●拙於筆墨, 而亦能日寫萬餘字, 不以鄙
遠, 夬蒙●●●●肯許, 應竭
●●●●●●駑能, 以効寸誠之萬一.●●●
●●●此非子路率爾之對, 實有所蓄積於
中,●血忱所
激, 不得不爾. 願先生亟賜草槁一部, 以遂大
願焉. 「黃朱」·「下武」二義,
怳如覩快. 竊伏想七十四卷之中, 如是二義
者, 開卷卽是. 小子
---귀국한 이후로 생각을 가다듬고 정리해 삼가 안부의 글을 올리려 했습니다만, (……) 두려움에 주저함이 더해지고, 또 존엄하신 분을 귀찮게 할까 싶어 감히 제 진심을 전하지 못했습니다. 매년 중추절 다음날이 선생의 생신이시니, 향을 피우고 초상(肖像)을 펼치고 (……)로써 제 마음을 담아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천만 뜻밖에도 올해 정월 20일, 보물 같은 편지 4장과 예서로 쓴 편액 한 부를 전해주셨습니다. 이는 실로 경오년(1810)과 신미년(1811)1)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으며 더욱이 먼저 보내신 것입니다. 편지는 수백 수천의 글자로 이루어졌는데, 글자는 얇기가 머리털 같고 정이 듬뿍 담긴 표현은 정성이 가득했습니다. 섬세하기로는 소의 털이나 누에의 실과 같으며 크고 높기로는 산과 바다와 같아서, 귀를 대고 이야기하고 얼굴을 맞대고 말씀해주시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것이 어찌 소자 한 사람만의 행복이겠습니까. 동토(東土, 조선)의 혼매함이 활짝 열려 큰 밝음으로 나아가는 일대 관건임을 어찌 감히 속일 수 있겠습니까. 선생께서 경(經)에 대해 논설한 것이 70여 권 되는데, 이내 증보와 산삭(刪削)이 이루어져 가볍게 출간하지 못하시고, 또 베껴 쓸 사람을 찾았지만 아직 정본(淨本, 정본定本) 정리를 다 끝마치지 못했다고 하셨습니다. 살며시 생각하건대, 선생께선 자신을 낮추고 억누르시기를 우(禹)임금의 자만하지 않는 의리2)와 위 무공(衛武公)의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가르침3)을 실천하시어, 매일 새벽에 원고를 재차 검토하며 교감(校勘)4)하는 일을 수고로 여기지 않으신 듯합니다. 이는 참으로 노년의 훌륭한 모습이시자 후생의 큰 복이니, 소자가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살며시 살펴보건대, 선생의 뜻은 후세에 있을 뿐 지금에 있지 않은 듯합니다.
그런데 소자 같은 사람은 지금 사람인 바, 만일 후세를 생각하신다면 마땅히 지금 시점부터 시작하셔야 합니다. 본디 옛사람이 책을 저술해 가르침을 전하는 일은 당대를 위한 설계에 그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내용이 학관(學官)에 열거되거나5) 당대에 유행하는 것은 모두 당대로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근래 저마다 학파가 다르고 사방에서 소요가 발생해 (……) 이것을 우려합니다. 하지만 (……) 이 때문에 정강성(鄭康成) 이후에 왕보사(王輔嗣)6)가 있고 왕보사 이후에 또 고염무(顧炎武)·민(閔, 미상)·왕부지(王夫之)7)·안원(顏元)8) 등이 있어 서로 정자(程子)와 주자(朱子) 같은 대유(大儒)들을 치켜세우기도 하고 억누르기도 했습니다. 근세의 모대가(毛大可)9)·진계원(陳啓源)10)·대동원(戴東原)11) 같은 사람에 이르러선 떠들썩함이 극에 이르렀습니다. 비록 공정한 자세로 돌아가 송사와 다툼을 멈추게 하려 했지만 아무도 관여할 수 없었으니 그 뜻을 이룰 수 없음이 명백했습니다. 오직 정현이 왕숙과 어떤 차이인지, 정자·주자가 모기령·진계원 등과 어떤 차이인지를 살필 뿐이니, 부디 선생께서 이를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옮겨 베낄 힘이 없다는 말씀에 대해선, 소자의 의혹이 더욱더 큽니다. 소재(蘇齋, 옹방강의 호) 문하의 학자들 가운데 아직 임(林) (……) 진(陳) (……) 구(求) 등이 있는데 무슨 어려움이 있다는 말씀이신지요. 그럼에도 여의치 않다면 소자의 글씨 솜씨가 볼품없긴 해도 하루에 1만여 글자를 써낼 수 있습니다. 촌스럽다고 멀리 내치지 않고 기꺼이 승낙해주신다면 부족하나마 온힘을 모아 제 성의를 다하겠습니다. 이것은 자로(子路)가 생각 없이 불쑥 대답하듯12) 한 것은 아니고, 실로 마음속에 축적된 것이 피 끓는 정성에 격동된 것으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디 선생께서 초고 한 부를 속히 보내주시어 저의 큰 소원을 이루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황주(黃朱)」13)와 「하무(下武)」14)에 대해 전해주신 말씀은 마치 실체를 훤히 보는 듯합니다. 조심스레 생각건대 74권 가운데 이 두 가지 의미가 책을 펼치는 즉시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소자의[김정희]
0) 후지츠카 치카시의 『청조문화 동전 연구(淸朝文化東傳硏究)』 등에 의하면, 추사가 옹방강으로부터 받은 편지는 모두 4통이다. 제1신: 1815년 10월 14일. 제2신: 1816년 1월 25일. 별봉 편지: 1916년 10월 27일. 제3신 1817년 10월 27일.
1) 경오년(1810)과 신미년(1811): 경오년은 김정희가 연경에 가 옹방강을 만날 때이고, 신미년은 그 다음 해이다. 내용으로 볼 때 이 두 해 이후에 받은 서신으로 보이는데, 현재 확인되는 1815년 1월 4일에 받은 첫 번째 받은 서신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그 전에 받은 또다른 편지를 가리키는지는
미상이다.
2) 우(禹)임금의 자만하지 않는 의리: 『서경』 「우서·대우모(虞書大禹謨)」의 “대우(大禹)는 자만하고 과시하지 않았다(大禹不自滿假)”는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3) 위 무공(衛武公)의 ~ 가르침: 늙었음에도 새로운 의지를 다지는 일을 비유한다. 위 무공은 95세에도 사람들에게 자신을 일깨울 좋은 말을 해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시경 』 「대아·억(大雅虞書抑)」에는 무공이 스스로를 경계하며 지은 시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기술되어 있다. “말을 함부로 하지 말고 구차하게 하지 말라. 내 혀를 잡아주는 이 없으니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無易由言, 無曰苟矣. 莫捫朕舌, 言不可逝矣).”
4) 교감(校勘): 원문의 ‘단황丹黃’은 단사(丹砂)와 연분(鉛粉) 등의 안료를 사용하여 서적에 구두점을 찍고 오류를 고치는 것. ‘단연(丹鉛)’이라고도 한다.
5) 학관(學官)에 열거하거나: 학관은 과목을 담당한 교수이므로, 정규 과목에 편입되어 담당 교수를 두었다는 말이다.
6) 왕보사(王輔嗣): ‘보사’는 왕필(王弼, 226~249)의 자. 산양(山陽) 고평(高平, 지금의 산동성 미산현) 사람이다. 하안과 함께 위진(魏晉) 현학(玄學)의 시조로 일컬어졌다. 『주역주(周易註)』와 『노자주(老子註)』를 남겼다.
7) 왕부지(王夫之): 1619~1692. 명말·청초의 학자. 자는 이농(而農), 호는 강재(薑齋)·매강옹(賣薑翁)·호자(壺子)·선산노농(船山老農) 등이다. 호남성 형양(衡陽) 사람으로 명나라 말기 혼란한 시대를 맞아 강산(薑山)·선산(船山) 등에 은거하며 학문과 저술에 몰두했다. 저서로는 『주역외전(周易外傳)』, 『주역내전(周易內傳)』, 『상서인의(尙書引義)』, 『장자정몽주(張子正蒙注)』가 있다.
8) 안원( 顏元): 1635~1704. 청나라의 경학가. 자는 이직(易直), 호는 습재(習齋). 젊어서 육구연(陸九淵), 왕양명(王陽明)을 좋아했으나 나중에는 정주학(程朱學)을 숭상했다. 그의 문하생 이공(李塨)과 함께 공담(空談)을 비판하고 실천적 학문을 주장함으로써 ‘안리학파(顔李學派)’라는 말을 들었다. 저술로 『사서정오(四書正誤)』, 『주자어류평(朱子語類評)』, 『습재기여(習齋記餘)』 등이 있다.
9) 모대가(毛大可): ‘대가’는 명말의 학자 모기령(毛奇齡, 1623~1716)의 자. 호는 서하(西河)다. 명나라가 멸망한 후 은둔했다가 강희 연간에 한림원 검토관(檢討官)에 임명됐다. 『명사(明史)』를 찬수한 뒤 사임하여 다시는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경학 관련 저서가 많은데 송학(宋學)의 잘못을 지적한 내용이 많다. 『서하문집(西河文集)』 외 200여 권의 저술이 있다.
10) 진계원陳啓源: 청나라 강희 시기의 제생(諸生)으로, 자는 장발(長發)이며 강남 오강(吳江) 사람이다. 저서로 『모시계고편(毛詩稽考編)』이 잘 알려져 있으며, 『상서변략(尙書辨略)』, 『독서우필(讀書偶筆)』, 『존경당고(存耕堂稿)』 등이 있다.
11) 대동원(戴東原): ‘동원’은 청나라 때 경학자 대진(戴震, 1724~1777)의 자. 호는 고계(杲溪)이다. 강영(江永, 1681~1762)을 사사해 그의 학문을 전수 받았으며 경학·문자학·철학·천문·수학·지리를 깊이 연구했다. 경전 연구에서는 성음과 문자를 통해 훈고를 구하고, 훈고를 통해 의리를 구할 것을 주장했다. 학문의 방법론으로 고증을 통한 실사구시를 중시했다. 저술로는 『맹자자의소증(孟子字義疏證)』, 『상서의고(尙書義考)』, 『고계시경보주(杲溪詩經補注)』, 『육서론(六書論)』, 『교정수경주(校正水經注)』 등이 있다.
12) 자로(子路)가 ~ 대답: 『논어』 「선진(先進)」에서 공자가 제자들에게 자신의 포부를 말하게 했을 때 “자로가 선뜻 나서 대답하기를(子路率爾而對曰)…… ”이라 한 부분을 가리키는 것이다.
13) 「황주(黃朱)」: 붉은색 속에 노란색을 띤 것. 『시경』 「소아·사간(斯干)」에서 “주불사황(朱芾斯皇)”이라고 한 것에 대해 한나라 정현은 “불(芾)은 천자가 순수한 붉은색이고 제후는 주황색인 것이다”라고 해석했고, 공영달은 “천자는 순수한 붉은색으로 그 깊이를 드러내고 제후는 주황색으로 그 얕음을 드러낸다”라고 해석한 내용이 있다.
14) 하무(下武): 원문의 ‘승조무(繩祖武)’는 ‘선대의 자취를 계승하다’의 뜻으로, 『시경』 「대아‧하무(下武)」에 “밝은지라, 내세에 그 조상의 발자취를 계승한다면 아, 만년토록 하늘의 복을 받으리라(昭玆來許, 繩其祖武, 於萬斯年, 受天之祜)”에서 유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