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수곤에게 보낸 편지 세 번째 면
金君●●袖示大先生親寫手卷一軸, 欽敬賁歎不能自
已. 第其落款處一二字, 不似大先生筆意者, 甚可
訝也. 大先生書法, 建外更有蒼雅意, 非他所能倣, 雖
弟肉眼尙能辨別. 弟之一生所心摹手追, 反有刻鵠畵虎●
●之譏, 令人好覺一笑. 吾兄書法, ●於大先生蒼
雅頓坐處, 不無學習, 此又過庭之暇, 有所聞而然否?
弟之嘗疑之而未解者也.
史閣部遺像及文集, 曾有煩陳, 而未蒙答敎.
此是
純皇帝已爲褒忠獎節, 天下皆知,
聖度之恢■…■, 天地之無不覆且載也, 日月
之無不■…■. 海外之人, 尙未得見, 殊非
純皇帝無不周洽之聖意也. 在臣子之
道, 尤當對揚盛烈, 使函光益闡, 亦爲未…
弟非吾兄, 不敢出此言也. 像如摹取, 不必
裝也. 文集亦望廣搜寄惠也.
김군(金君, 미상)이 손수 전해준 대선생(大先生, 옹방강)의 친필 한 축은 흠모와 감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낙관 부분의 한두 글자가 대선생의 필의(筆意)를 닮지 않은 듯해 매우 의아합니다. 대선생의 글씨는 건장함과 함께 푸르고 고아한 뜻이 담겨 있어 다른 사람이 모방할 수 없기에 저는 육안으로도 판별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일생 동안 마음으로 임모하고 손으로(손을 뻗어) 따라잡으려 해도 고니를 새기느니, 호랑이를 그리느니1) 따위의 비난을 받고, 비웃음을 자아낼 뿐입니다. 우리 형의 글씨는 대선생의 푸르고 전아함이 깃든 부분을 배운 바가 없지 않으신 듯한데, 평소 모시며 지낼 때 직접 들은 바가 있었던 것이겠지요? 이는 제가 일찍이 풀리지 않았던 의심입니다.
사각부(史閣部)2)의 유상(遺像)과 문집 건에 대해 일찍이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아직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이분에 대해 순황제(純皇帝, 건륭황제)께서 이미 그 충성과 절의를 표창, 장려하심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는 사실입니다. (……) (황제의) 드넓으신 마음은 하늘과 땅처럼 모두를 덮어주고 실어주며, 해와 달처럼 온 누리를 비춰주는 것과 같습니다. 바다 밖 사람이 여전히 그것을 보지 못한 것은 순황제의 두루 미치지 않음이 없는 성스러운 뜻이 아닐 것입니다.
신하로 있으면서 그 성대한 공을 더욱 찬양하여 그 빚이 더욱 빛나도록 하는 것 또한 (……) 우리 형이 아니면 제가 감히 이런 말씀을 드리지 못할 겁니다. (사가법) 초상을 임모하게 된다면 반드시 장정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문집 또한 두루 찾아 붙여주시기를 앙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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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니를 ~ 그리느니: “고니를 그리다 보면 오리 비슷하게라도 되겠지만, 호랑이를 잘못 그리면 거꾸로 개처럼 되기 십상이다(刻鵠不成尙類鶩 畫虎不成反類狗).”(『후한서(後漢書)』 「마원전(馬援傳)」
2) 사각부(史閣部): 명나라 말기의 정치가이자 항청(抗淸) 명장인 사가법(史可法, 1602~1645)을 가리킨다. 자는 헌지(憲之), 호는 도린(道隣)이며 하남 상부(지금의 개봉開封) 사람이다. 원외랑(員外郞), 낭중, 조운총독(漕運總督), 건극전(建極殿) 대학사, 병부 상서를 역임했다. 순치 2년, 청나라군이 양주성을 포위 공격했을 때 성이 함락되자 투항을 거부하고 죽음을 맞았다. 그의 사후 남명 조정에 의해 ‘충정(忠靖)’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청나라 건륭제가 또 그에게 ‘충정(忠正)’이라는 시호를 추증했다. 후인들이 그의 저작을 모아 『사충정공집(史忠正公集)』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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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니를 ~ 그리느니: “고니를 그리다 보면 오리 비슷하게라도 되겠지만, 호랑이를 잘못 그리면 거꾸로 개처럼 되기 십상이다(刻鵠不成尙類鶩 畫虎不成反類狗).”(『후한서(後漢書)』 「마원전(馬援傳)」
2) 사각부(史閣部): 명나라 말기의 정치가이자 항청(抗淸) 명장인 사가법(史可法, 1602~1645)을 가리킨다. 자는 헌지(憲之), 호는 도린(道隣)이며 하남 상부(지금의 개봉開封) 사람이다. 원외랑(員外郞), 낭중, 조운총독(漕運總督), 건극전(建極殿) 대학사, 병부 상서를 역임했다. 순치 2년, 청나라군이 양주성을 포위 공격했을 때 성이 함락되자 투항을 거부하고 죽음을 맞았다. 그의 사후 남명 조정에 의해 ‘충정(忠靖)’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청나라 건륭제가 또 그에게 ‘충정(忠正)’이라는 시호를 추증했다. 후인들이 그의 저작을 모아 『사충정공집(史忠正公集)』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