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再復初集』內先生詩●●, 有遺
而不錄者, 是有刪正耶? 偶爾見漏耶? 弟之所曾讀, 如羅
兩峰鬼趣圖五言古詩, 李雨邨『粵東皇華集』內所
附五言古詩, 又趙『甌北集』內所附五言古詩, 毛朱像七言絶句一首, 集內又有毛朱像詩而不是, 皆不入錄, 此皆見
刪者耶? 弟於『復初集』, 有訂正●字誤●者, 書成擬幷附補
遺, 故有此仰質, 幸敎示. ●…●蘇跡詩之另抄者,
幾盡書出, 如刊成, ●…●卽當以幾本送寄也. 於兄又有
不得不奉懇者, 「天際烏雲帖」題詠●…●. 亟令胥
鈔, 而幷及『施注蘇詩』卷上題詠, 又錄坡公生辰前後諸公
詩詠, 彙成一書, ●亦使遠人●得一讀, 尤幸也. 坡公生辰詩, 弟卽
自宋西坡以下搜集成書, 而●所考不廣, 零星潦草, 不成卷帙. 兄
須出力圖之, 以完此事否? 雖小不可忽也. 吾輩明年爲三十矣, 人生三十,
是回甲之半. 竊計吾已往之三十年, 有何成就? ●以後之
三十年, 又未知果何如也. ●…●若
●…●於熒魄曠枯, 精業曠沈, 則●尙復何及? 『易』曰:
‘君子進德修業, 欲及時也.’●…● 兄其勉之! 每自省惕
若, ●…●有此交勉, 兄其虛受否? 情愛
之極, 言不知裁, 不能自已也. ●芸臺先生尙督漕不
還否? 弟於云臺, 慕其風, 而愈久愈長. 弟之所見中朝大
人, 雖不多, 以弟所見, 如大先生如泰山喬嶽, 芸臺如祥
麟威鳳, 而二公可盡平生之觀. 弟所未見, 如朱竹垞
紀曉嵐彭雲楣劉石葊錢蘀石諸公, 果何如耶? 雲臺先生慕錢曉
徵之爲人, 揅經之扁, 亦由是也. 錢公著述, 有聞未見,
多有刊行於世者否? 程魚門之詩, 亦有刊行者否? 近來
諸名公著述之有關於經術, 詩文之有關於風敎, 無論弟
之知與不知, 有刊本, 則皆令各寄一部否? 如兄或無
有, 則●●錄單贈●楊君●, 使之購之廠肆如何?●●
●…●嘗聞紀文端云:‘古文之學, 自『左』·『國』·『莊』·『騷』至於八家, ●…●皆已
經古人◘(……)◘, 今幾無餘存者. 惟太史公「贊」, 無人爲之者.’ 此言極有味. 且聞阮芸臺云:‘前後兩『漢書』,
皆無客氣語, 至於昌黎, 矯『文選』之流弊而已. 此非薄昌黎也, 其實卽如此.’ 此言亦極有味, 未知
大先生緖論想有牖昏啓來之法諦矣, ●…●如何如何? 袁子才詩法才氣太勝, 不能
如大先生詩法蒼
欝典則循蹈正
規. 詩之有才有客
氣, 尤非弟所尙. 此
則恪恃大先生
法律也. 大抵袁
詩不如蔣苕生,
當世定論, 亦復何
如? 袁集有顧備
九墓銘, 顧公所
著『虞東學詩』, 弟
所苦心, 而無以得
見. 胡朏明『易圖
明辨』, 年年求之
不得.●…●
●…●項安世
『周易玩辭』, 是
大先生之所嘗稱,
而亦求之有年,
皆不見, 令人結
痞欲成疾也.
재간행한 『복초재집(復初齋集)』에 선생의 시가 수록되지 않았는데, 수정하고 편집했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우연히 누락된 것입니까?
제가 일찍이 선생께서 쓰신 나양봉(羅兩峰)의 귀취도(鬼趣圖)1)에 대한 오언고시(五言古詩)와 이우촌(李雨邨)2)의 『월동황화집(粵東皇華集)』에 부록으로 실린 오언고시, 조익(趙翼)의 『구북집(甌北集)』3)에 부록으로 실린 오언고시, 모주상(毛朱像)4) 관련 칠언절구 1수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해당 문집에 모주상 관련 시가 있는데 충분치 않습니다.] 이러한 작품들이 모두 수록되지 않았으니 이들 시가 모두 삭제된 것입니까? 제가 『복초재집』의 오자를 수정한 것이 있는데, 책을 간행할 때 이 내용을 보완하여 채워 넣었으면 하여 이렇게 여쭤본 것이니, 부디 의견을 주시기 바랍니다.
(……) 별도로 초록한 선생의 소동파 관련 시들은 거의 다 써놓았으니, 책이 간행되면 (……) 바로 몇 질을 보내주셨으면 합니다. 형에게 또 어쩔 수 없이 간청드릴 일이 있습니다. 「천제오운첩(天際烏雲帖)」5) 관련 제영(題詠, 해당 작품에 대해 읊은 시)을 (……) 속히 베끼도록 하되, 『시주소시(施注蘇詩)』6) 관련 제영을 포함하고 또 동파공의 생신 전후 제공들의 시들도 포함해서 이를 한 책으로 엮어 보내주시어, 먼 곳에 사는 사람이 읽을 수 있게 해주신다면 더없이 행복하겠습니다.
동파공의 생신 관련 시는 제가 송서파(宋西坡)7) 이후의 것을 수집해서 책으로 만들었는데, 참고의 폭이 넓지 못하고 엉성하고 부실해서 책으로 묶어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형께서 힘써 도와주시어 이 일을 완성하게 해주시겠습니까? 작은 일이지만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내년이면 30세가 됩니다. 나이 서른은 회갑의 절반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저의 지난 30년 삶에서 이룬 것이 뭐였을까요? 이후에 30년은 또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 만약 영혼이 메마르고 정신이 침체된다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주역』에 이르기를 “군자가 덕을 발전시키고 학업을 닦는 것은 제때 쓰이기 위함이다”라고 했습니다. (……) 형께서도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늘 성찰하고 조심하여 (……) 이처럼 권면한 것인데, 형께서 마음을 비우고 받아주시겠는지요? 좋아하는 정이 지극하여 말이 절제 없이 이어졌습니다.
운대(芸臺, 완원) 선생께선 여전히 총독조운(總督漕運)에서 돌아오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운대에 대해 그 풍모를 사모하는 마음이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깊습니다. 제가 뵌 중조(中朝, 중국)의 대인들이 많진 않지만, 제가 보는 바 대선생(大先生, 옹방강)은 큰 산의 드높은 봉우리와 같고 운대는 상서로운 기린·의젓한 봉황 같아서, 두 분에게서 제가 일생 봐야 할 것을 다 본 듯합니다. 제가 뵙지 못한 주죽타·기효람(紀曉嵐)8)·팽운미(彭雲楣)9)·유석암(劉石菴)10)·전탁석(錢蘀石)11) 같은 분들은 정말 어떤 분들일까요? 운대(雲臺,芸臺) 선생께서 전효징(錢曉徵)12)의 인품을 사모하셨는데, ‘연경(揅經)’ 편액 또한 여기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전공(錢公, 전대흔)의 저술은 듣기만 하고 보지 못했는데 세상에 간행된 것이 많습니까? 정어문(程魚門)13)의 시 또한 간행된 것이 있습니까? 근래 명사들의 저술 가운데 경학(經學)과 관련되거나 시문 가운데 교화와 관련된 것은 제가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간행본이 있으면 모두 한 부씩 부쳐주실 수 있겠습니까? 형께서 갖고 계시지 않으면 해당 책 이름을 양군(楊君)에게 적어주어, 책방에서 구입해 오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일찍이 들은 바에 따르면, 기문달(紀文達, 기윤)이 “옛 사람의 학문은 『춘추좌전(春秋左傳)』·『국어(國語)』·『장자(莊子)』·『이소(離騷)』에서부터 당송 팔대가에 이르기까지 모두 옛 사람의 (……) 지금 거의 남아 있는 것이 없는데, 오직 태사공(太史公) 「찬(贊)」은 하는 사람이 없다”라고 했다 하는데, 이 말은 극히 의미가 있습니다. 또 완운대께서 “전·후 양한(兩漢)의 글은 모두 객기 표현이 없는데 한창려(韓昌黎, 한유)에 이르러 『문선(文選)』의 폐해만 바로잡았을 뿐이다. 이는 한창려를 박대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 또한 지극히 의미가 있습니다. 대선생의 말씀에도 어두운 것을 열어주고 후인들을 개도하는 깨우침이 있으실 터인데, (……) 어떠신지요?
원자재(袁子才, 원매)의 시는 재기(才氣)가 매우 넘쳐 대선생의 시와 같이 파릇하고 울창하고 전아하여 정도(正道)를 밟는 것만 못합니다.
시에 재기가 있고 객기가 있는 것은 더욱이 제가 중시하는 바가 아닙니다. 이 부분에 있어선 대선생의 규율을 엄격히 믿습니다. 대체로 원자재의 시는 장소생(蔣苕生)14)만 못하다는 것이 당대의 정론인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원자재의 문집(『소창산방문집(小倉山房文集)』)에 고비구(顧備九)15)의 묘지명이 들어 있는 바, 고공(顧公)이 지은 『우동학시(虞東學詩)』를 제가 애써 찾고 있는데 구할 수가 없습니다. 호비명(胡朏明, 호위)의 『역도명변(易圖明辨)』16)도 해마다 구하고자 하는데 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 항안세(項安世)의 『주역완사(周易玩辭)』17)도 대선생께서 일찍이 높이 평가하신 겁니다. 한동안 구하고자 했으나 구할 수가 없으니 답답하여 병이 생기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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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귀취도(鬼趣圖): 청대의 화가 나빙(羅聘)이 귀신을 소재로 그린 그림을 일컫는다. 나빙은 여러 차례 귀취도를 그렸는데 훗날 경성에 가서 명사들을 만났을 때 귀취도가 크게 주목받았다. 귀취(鬼趣)는 불교에서 중생이 윤회전생하는 6가지 세계 중의 하나인 「아귀도(餓鬼道)」에 등장하며 ‘아귀’라고도 한다. 나빙은 해가 지면 거리가 귀신으로 가득 차며 부유한 집일수록 더욱 귀신이 많이 보인다면서 이때 본 것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귀취도 발문에는 원매·기윤을 비롯하여 장사전(蔣士銓), 정진방(程晉芳), 옹방강, 전대흔 등 당대 명사들의 글이 두루 망라됐다. 현재 전하는 작품에는 박제가의 글을 포함하여 모두 127편이 실려 있다.
2) 이우촌(李雨邨): ‘우촌’은 청나라의 문인 이조원(李調元, 1734~1803)의 호. 자는 갱당(羹堂) 또는 갱당(秔塘)이고, 사천성 나강현(羅江縣)(지금의 면양시) 사람이다. 『동산시문집(童山詩文集)』, 『우촌시화(雨村詩話)』, 『담묵록(淡墨錄)』 등 많은 저작이 있고, 총서로 『함해(函海)』가 있다. 유득공의 숙부인 유금(柳琴)이 1776년 연경에 가서 이조원과 처음 만난 이후 조선의 문인들에게 알려졌는데,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권35 「이우촌」 항목에 그에 대한 자세한 소개가 있다.
3) 조(趙)의 『구북집(甌北集)』: ‘조(趙)’는 청나라의 문신 조익(趙翼, 1727~1814)을 말한다. 자는 운송(耘松), 호는 구북(甌北)‧구악(裘萼)‧삼반노인(三半老人)이다. 건륭(乾隆) 15년(1750) 내각 중서로 기용된 뒤 1756년 군기처에 들어가 군사 문서 작성에 특출한 능력을 발휘했으며 이후 귀서(貴西)의 병비도(兵備道)에 올랐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안정서원(安定書院)의 주강(主講)을 맡았는데 역사학에 뛰어나고 고증이 정밀했다. 시 짓기에도 뛰어나 원매(袁枚)‧장사전(蔣士銓)과 함께 ‘건륭 3대가’로 불렸다. 저서로 『구북집』 외에 『구북시초(甌北詩草)』, 『이십이사차기(二十二史箚記)』, 『해여총고(陔餘叢考)』 등이 있다.
4) 모주상(毛朱像): 본 필담첩 내에서 “주야운이 죽타(竹垞, 주이준), 서하(西河, 모대가) 두 선생의 상을 보내왔습니다”라고 한 내용으로 볼 때 주이존(朱彝尊, 1629~1709)과 모기령(毛奇齡, 1623~1716)의 초상화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5) 「천제오운첩(天際烏雲帖)」: 옹방강이 소장한 소식(蘇軾) 친필의 칠언절구 필첩이다. 일찍이 신위, 김정희 등 조선의 문인들이 이에 대한 시문을 많이 남겼다.
6) 『시주소시(施注蘇詩)』: 남송 시원지(施元之, 1102~1174)의 소식(蘇軾) 시 주석서로, 최초의 소식 시 주석이다. 1773년 옹방강이 송대 판본 『시주소시』를 구입한 뒤 소식의 생일에 소식을 추모하는 수소회(壽蘇會)를 열었고, 이후 이 책 관련 다양한 제발(題跋)과 제영(題詠)들이 지어졌는데 자하 신위와 추사 김정희도 이에 대한 글을 남겼다.
7) 송서파(宋西陂): 원문의 ‘坡’는 ‘陂’의 오기로 보임. 서피는 송락(宋犖, 1634~1713)의 호. 자는 목중(牧仲)이고 하남 귀덕부(歸德府, 지금의 하남 상구시商丘市) 사람이다. 시인이자, 화가이고 정치가이다. 산동 안찰사(山東按察使)·강소 포정사(江蘇布政使)·강서 수무(江西巡撫) 등을 역임했다. 주이준(朱彝尊)·시윤장(施閏章) 등과 함께 ‘강희시대십대재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저서로 『서피유고(西陂類稿)』『만당설시(漫堂說詩)』 등이 있다.
8) 기효람(紀曉嵐): ‘효람’은 기윤(紀昀, 1724~1805)의 자. 호는 석운(石雲)이며 직예 하간부(河間府, 지금의 하북성 창주시와 하간시) 헌현(獻縣) 사람이다. 청대의 관리이자 문학가로 예부 상서, 태자소보(太子少保) 등을 역임했다. 평생 『사고전서』 편찬을 이끌었으며 저서로 『열미초당필기(閱微草堂筆記)』, 『기문달공유집(紀文達公遺集)』 등이 있다. 박제가, 이덕무 등 조선 문인들과 두루 교류하면서 글을 써주기도 했다.
9) 팽운미(彭雲楣): 1731~1803. 청나라의 대신이자 학자로, 대련을 잘 짓기로 유명했다. 장사전(蔣士銓)과 함께 ‘강우 양명사(江右兩名士)’로 일컬어졌다. 교육부 독학(敎育部督學)을 역임했다.
10) 유석암(劉石菴): ‘석암’은 유용(劉墉, 1719~1805)의 호. 자는 숭여(崇如), 시호는 문청(文清)이며, 산동성 저성(諸城, 지금의 저성시) 사람이다. 도찰원(都察院) 좌도어사(左都御史)·공부 상서 겸 이부 상서·상서방(尚書房) 총사부(總師傅) 등을 역임했다. 서예에 뛰어나 철보(鐵保), 옹방강, 영성(永瑆)과 함께 청나라 4대 서예가로 꼽힌다. 저서로는 『석암시집(石庵詩集)』이 있다.
11) 전탁석(錢蘀石): 탁석은 청대의 관리이자 시인, 서화가인 전재(錢載, 1708~1793)의 호. 자는 곤일(坤一)이고 만호(晩號)는 만송거사(萬松居士)‧백폭노인(百幅老人)이다. 절강성 수수(秀水, 지금의 가흥시 북쪽 지역) 사람으로 내각학사 겸 예부시랑을 역임했다. 저서로 『석재시문집(石齋詩文集)』이 있다.
12) 전효징(錢曉徵): ‘효징’은 전대흔(錢大昕, 1728~1804)의 자. 호는 죽정(竹汀)이며 강소 태창주(太倉州) 가정현(嘉定縣, 지금의 상해시 가정구) 사람으로 공신관(功臣館) 찬수관(纂修官) 등을 역임했다. 부친상으로 귀향해 서원에서 강학하며 문하에 2000여 명의 제자를 두었다. 실사구시를 종지로 하여 사학, 경학, 소학, 산학, 교감학, 금석학 등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보였다. 그의 저서 『십가재양신록(十駕齋養新錄)』은 후대에 고염무의 『일지록(日知錄)』과 병칭되었다. 『속문헌통고』와 『청일통지』 편찬에 참여했고, 『잠연당금석문발미(潛硏堂金石文跋尾)』를 저술했다. 역사에 정통하여 『이십이사고이(二十二史考異)』를 저술했다.
13) 정어문(程魚門): ‘어문’은 정진방(程晉芳, 1718~1784)의 자. 호는 즙원(蕺園)이며 안휘성 흡현(歙縣) 사람이다. 경학자이자 시인이며, 내각 중서(內閣中書), 이부 주사(吏部主事) 등을 역임했다. 염업으로 많은 부를 축적하고, 원매(袁枚), 오경재(吳敬梓), 대진(戴震) 등과 교류했다. 『즙원시집(蕺園詩集)』, 『즙원근시(蕺園近詩)』, 『면행당시집(勉行堂詩集)』 외 많은 저술을 남겼다.
14) 장소생(蔣苕生): ‘소생’은 장사전(蔣士銓, 1725~1785)의 자. 호는 장원(藏園)이며 강서 연산(鉛山, 지금의 강서성 연산현) 사람이다. 한림원 편수를 역임했다. 희곡에 정통하고 시문에 능해 시 2,569편을 수록한 『충아당시집(忠雅堂詩集)』, 희곡 작품으로는 『홍설루구종곡(紅雪樓九種曲)』을 비롯해 49종을 남겼다.
15) 고비구(顧備九): ‘비구’는 고진(顧鎭, 1720~1792)의 자. 호는 고추(古湫)이고 우동(虞東) 선생으로도 불렸다. 강소성 소문(昭文, 지금의 상숙현의 일부) 사람으로 국자감 조교, 종인부주사(宗人府主事)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우동학시(虞東學詩)』, 『우동선생문록(虞東先生文錄)』 등이 있다.
16) 『역도명변(易圖明辨)』: 청나라 호위(胡渭)가 저술한 「하도낙서」 관련 전문서. 「하도낙서」의 내용을 두루 증명하고 검토하고 상호 참조를 통해 허위를 입증하고 정론화했다.
17) 항안세(項安世): 1129~1208. 자는 평보(平父), 호는 평암(平菴). 송(宋)나라 강릉(江陵) 사람으로 주희의 친구이다. 정이(程頤)의 『역전(易傳)』을 바탕으로 전개한 『주역완사(周易玩辭)』, 『항씨가설(項氏家說)』 등의 저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