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담필담서첩』에는 추사가 옹방강의 아들 옹수곤에게 보낸 편지의 초고로 보이는 내용이 들어 있다. “내년이면 30세”라는 문구로 볼 때 추사의 나이 29세 때인 1814년에 쓴 것으로 확인된다.
운암산장(雲巖山莊)을 매입해 옹방강의 형상을 새기려 한다는 내용은 새롭게 확인되는 사실이고, 옹방강의 경학 관련 저술을 보내달라는 요청은 이후 전해 받은 관련 문건과 연결된다. 옹방강의 문집인 『복초재집』의 오자를 수정했다는 내용에서 옹방강을 앙모하는 추사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또한 『고려사』의 오류 지적, 소동파 생일 관련 문헌 정리, 옹방강과 완원 관련 외 기윤과 유용 등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다양한 내용들이 들어있다.
당시 청나라 학자들의 동향과 그들의 저술을 구해달라는 부탁에서, 당시 북학에 대한 추사의 관심을 확인할 수 있는 귀한 자료이다.
(문장이 이어지는 ②"法碑也 未知的確否"는 다음 쪽에 있음)
●…●弟將與一二同志醵錢買雲
巖山莊, 移建覃齋於其中, 石上刻先生像如金山之
坡公像也. 比日楊●金●兩人之回, 書圅及諸件, 一一査收.
九種書, 尤爲覃齋中大墨緣. 繼此修刻者,●…●
更要寄來耳. 第先生詩詞, 已熟習, 而古文尙未得讀. 經說
尤係朝聞之至願, 雖未刻, 想有寫本之副矣, 幸以
各一部寄惠,●…● 以共同好之
義, ●心禱手祝. 前此●暴陳區區, 匪●止一再, 而未蒙
夬許, 端由誠淺志薄, 不足以動大人心, 徒抱耿耿,
甘此寂莫.●…●
此非弟一人之
私而已, 環東一國, 齊聲同籲, ●…●深有
望於克回慈悲之念, 廣施普濟之澤, 未知兄又將何
以敎我? 明德盛者光靈遠, 是以日月之光, 無幽不燭, 而百川之
赴於海者, ●不得不爾之勢也. 妙香碑, 考證明確宏博●, 顧
朱閻胡●…●之所不能說到者也. 麗史, 果國中絶罕, 弟
家所藏, 亦未得全●. 玆先鈔第○○○卷奉呈, 外
●…●此, 借鈔於南人處, 姑未還. 明秋憲使去時, 優可
付呈. 鄭獜趾本末, 係是莊憲王時人, 而人品極不好. 靖國
時不忠於舊君, 且其史●多有誣實. 以國恤篇之
見獎於朱竹垞者, 以竹垞之猶不得詳此史之事實也.
其一失實, 其一蕪襍, 其一澁略, 其一諛筆. 弟欲擬作高
麗史糾誤, 而未及成書. 如麗末忠臣, 皆云‘入於本朝’,
此意何在? 如弟之先祖, 有號桑村先生諱○○立
殣於麗末. 當時有輓之者曰: ‘有孝有忠難, 有忠有孝難.’
●蓋先祖又有●廬墓碑, 卽其旌孝者●…●, 故詩人之云云卽此也. 觀此
一段, 可推其二. 又如李遁邨●●者, 卒於麗亡前幾年, 而又云
‘入於本朝’者, 寧非可笑者耶. 東國文獻經壬辰倭亂●…●
如中國之靖康書厄, 無一餘存, 此書之存者, 皆壬辰以前本也. 是故散落●無完本,
藏完本者, 纔數三家. 如兄所錄東方諸書, 皆麗代書籍, 而●於兵燹, 亡失無存. 麗
代書之尙留者, 不四五本, 亦皆文人詩集, 而已斷爛文字. 惟殘金零石, 可徵典刑, 可哀
也. 雖以金石
●言之,●…●
●倭人皆
椎碎, 或善
本, 則輦歸
其國. 如興
法寺碑●入
輦歸中,
而中路誤
折其半,
遂棄●之
而去. 新羅
太宗碑劉仁願碑, 亦
椎碎其半,
●…●
●按之可悉
也. 嘗見『復
初集』內「晉
祠銘」絶句,
有‘新羅一
本大洋東’
者, 以指興
法碑也, 未知的確否?
(……) 저는 한두 사람의 동지와 돈을 갹출해 운암산장(雲巖山莊)을 매입한 뒤, 거기에 담재(覃齋, 옹방강의 서재)를 옮겨 짓고 바위에 금산사(金山寺)의 동파공상(東坡公像)1)처럼 선생의 상을 새기려 합니다. 근래 양(楊)·김(金) 두 사람이 돌아오는 편에 보내주신 서신과 기타 물건들은 하나하나 잘 받았습니다.
9종의 책은 담재의 대단한 묵연(墨緣)입니다. 앞으로 계속해서 인쇄될 책들도 (……) 계속 부쳐주셨으면 합니다. 선생의 시와 사(詞)는 이미 충분히 익혔습니다만, 고문(古文)은 여전히 읽지 못했습니다. 경(經)에 대한 설은 더욱이 ‘아침에 듣고 싶은’2) 간절한 기원이 담겨 있습니다. 아직 판각을 못했다 해도 필사한 부본이 있을 터인 바, 부디 한 부를 부쳐주시어 (……) 동호(同好)의 정의(情義)를 함께 해주실 것을 마음속으로 기도하고 두 손 모아 축원합니다.
앞서 느닷없이 드린 말씀이 한두 번이 아니었음에도 흔쾌한 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는 분명 정성이 얕고 의지가 엷어 대인(大人, 옹방강)의 마음을 충분히 움직이지 못한 데 따른 것으로, 걱정스러운 마음을 품은 채 이 아득함을 감내하고 있습니다. (……) 하지만 이것은 저 한 명의 사적인 바람일 뿐만 아니라 동방의 모든 이가 한목소리로 호소하는 바이니, (……) 부디 자비의 마음으로 널리 보살피는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점에 대해 형께서 앞으로 어떻게 저를 일깨워주시려는지요? 명덕(明德, 미덕)이 성대한 사람은 영광의 빛이 멀리 비춥니다. 그래서 해와 달의 광채는 깊숙한 곳까지 모두 비추고, 모든 강물이 바다로 향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형세입니다.
「묘향비(妙香碑)」(「묘향산보현사창사비명(妙香山普賢寺創寺碑銘」)는 고증이 명확하고 광범위하여 고염무(顧炎武)3)·주이준(朱彝尊)·염약거(閻若璩)·호위(胡渭)4)가 설파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고려사(高麗史)』는 정말 국내에 매우 드문데, 저의 집에 소장돼 있는 것도 온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지금 먼저 제 ○○○권만 베껴서 보내드리며, 그 밖에 것은 남인(南人, 남쪽 사람) 쪽에 사람을 보내 베껴오게 했는데, 아직 오지 않은 상태입니다. 내년 가을 시헌사(時憲使)5)가 갈 때쯤이면 충분히 보내드릴 수 있을 듯합니다.
정인지(鄭麟趾)는 장헌왕(莊憲王, 세종) 시대 사람인데, 인성이 아주 좋지 않습니다. 정국(靖國) 시절 옛 임금에게 충성하지 않았고,6) 또 역사 서술에 사실을 호도한 것이 많습니다. 「국휼(國恤)」편이 주죽타(朱竹垞, 주이준)에게 장려받은 것은 주죽타가 이 역사책의 실체에 대해 상세히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문제점을 들자면, 하나는 사실을 벗어난 것이고, 또 하나는 아무렇게나 모은 것이고, 또 하나는 난삽과 소략이고, 또 하나는 아첨이 담긴 글쓰기입니다. 제가 『고려사규오(高麗史糾誤)』를 쓰려 했습니다만 미처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예컨대 고려 말의 충신은 모두 본조(本朝, 조선조)에 들어왔다고 했는데, 도대체 무슨 말인 겁니까? 예컨대 저의 선조 가운데 호가 상촌(桑村)이고 휘가 OO(자수子粹)인 분이 계시는데 고려 말에 사절(死節)하셨습니다. 당시 조사를 쓰신 분이 ‘효도에 충성까지 갖추기 어려운데, 충성에 효도까지 갖추긴 더 어렵다’고 했습니다. 선조에게는 또 여묘비(廬墓碑)가 있는데 바로 효자임을 표창한 정효비(旌孝碑)였습니다. 그래서 애도시에서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 일단만 살펴봐도 나머지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 또 이둔촌(李遁邨)7)이란 분은 고려가 망하기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났는데 ‘본조에 들어와’라고 하고 있으니 이 어찌 가소롭지 않겠습니까?
동국의 문헌은 임진왜란을 겪고 나서 마치 중국 정강(靖康)의 서액(書厄)8)처럼 하나도 남은 게 없으며, 현재 남아 있는 이 책은 모두 임진왜란 이전의 판본입니다. 그 때문에 대부분 흩어지고 떨어져 완전한 것이 없으며, 완질을 소장한 경우는 몇몇 집 정도입니다. 형께서 적어 보내신 동방의 서책들은 모두 고려 시대의 서적들로, 병화에 의해 망실되어 남은 게 없습니다. 고려 시대 책으로 현존하는 것은 4~5종에 지나지 않고, 그것도 모두 문인들의 시집인데, 그것마저 이미 조각난 문자들입니다. 오직 부서지고 망가진 금석(金石)만이 그 전형(典刑)을 증명할 수 있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금석의 경우도 왜인(倭人)들이 모두 깨부쉈으며, 그 가운데 좋은 것은 수레에 실어 자기 나라로 가져가 버렸습니다. 예컨대 흥국사비(興法寺碑)9)는 수레에 싣고 가는 길에 반토막이 나자 결국 버리고 갔습니다. 신라태종비(新羅太宗碑)10)와 유인원비(劉仁願碑)11)도 그 절반을 깨부쉈으니 내용을 살펴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일찍이 『복초재집(復初齋集)』 내의 「제진사명 6수(題晉祠銘六首)」 절구(絶句)에 ‘신라의 한 본(本)이 대양 동쪽에서 왔거니’12)라는 내용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흥법사비를 지칭한 것으로 보이는데, 맞습니까?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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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금산사(金山寺)의 동파공상(東坡公像): 금산화상(金山畫像). 금산사(金山寺, 지금의 강소성 진강시鎮江市 금산에 소재)에 있는 소식의 그림으로, 이공린(李公麟)이 그린 것이다. 『금산지(金山志)』에 “이용면(李龍眠, 이공린)이 동파상을 그려 금산사에 전했는데, 동파가 금산사에 갔을 때 이 그림을 보고 「자제금산화상(自題金山畫像)」을 지었다(李龍眠畫東坡像留金山寺, 後東坡過金山寺, 自題「自題金山畫像」)”는 내용이 있다.
2) 아침에 ~ 싶은: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으로, 『논어』 「이인(里仁)」의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3) 고염무(顧炎武): 1613~1682. 명말‧청초의 학자. 자는 충청(忠淸), 영인(寧人), 호는 정림(亭林)이다. 명나라가 망한 뒤 농사를 짓고 살다가 청나라 때 박학홍사(博學鴻詞)로 천거되었고, 『명사(明史)』를 편찬하라는 부름을 받았으나 어머니의 유명(遺命)을 받들어 응하지 않았다. 저서로는 『일지록(日知錄)』, 『좌전두해보정(左傳杜解補正)』, 『석경고(石經考)』, 『음학오서(音學五書)』 등이 있다.
4) 호위(胡渭): 1633~1714. 자는 비명(朏明), 호는 동초(東樵)이며 절강성 덕청(德清, 지금의 절강 호주시 덕청현) 사람이다. 15세에 현학생(縣學生)이 되었지만 여러 차례 과거에 떨어져서 공명의 길을 포기했다. 일찍이 『일통지(一統志)』 편찬에 참여했으며, 『역도명변(易圖明辨)』을 지어 「하도낙서(河圖洛書)」, 「무극(無極)」, 「태극(太極)」, 「선천(先天)」 등의 그림을 설명했으나 이는 모두 송나라의 도사 진단(陳摶)과 성리학자인 소옹, 주돈이 등의 주장을 날조한 것이다. 기타 저서로 『홍범정론(洪範正論)』, 『대학익진(大學翼眞)』 등이 있다.
5) 시헌사(時憲使): 매년 청나라에서 발급하는 시헌력(時憲曆)을 받기 위해 조선에서 보내는 사신이다.
6) 정국(靖國) ~ 않았고: ‘옛 임금’이란 조선 제6대 왕 단종(端宗)을 뜻한다. 정인지는 계유정난 당시 수양대군(세조)을 도와 좌의정에 올랐다.
7) 이둔촌(李遁邨): ‘둔촌’은 고려 후기의 학자이자 문인인 이집(李集, 1327~1387)의 호. 본관은 광주(廣州), 초명은 원령(元齡), 자는 호연(浩然)이다. 이색‧정몽주 등과 교유했으며, 저서로는 『둔촌유고(遁村遺稿)』가 있다.
8) 정강(靖康)의 서액(書厄): 북송 정강(靖康) 연간(1126~1127)에 금나라가 변경(汴京)과 개봉(開封)을 침략해 황실이 소장한 각종 도서를 약탈하거나 짓밟은 사건을 가리킨다. 중국의 10대 서액(西厄) 가운데 하나다.
9) 흥국사비(興法寺碑): 정식 명칭은 ‘흥법사진공대사탑비(興法寺眞功大師塔碑)’이다. 나말여초의 고승인 진공대사(眞空大師, 869~940)의 공덕을 기린 탑으로, 비문은 고려 태조 왕건이 짓고 글씨는 당 태종 이세민의 글자를 집자한 것이다. 옹방강 등 청대 고증학자들이 꼭 구하고자 했던 조선의 주요 탁본 가운데 하나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10) 신라태종비(新羅太宗碑): 정식 명칭은 ‘신라태종무열왕릉비(新羅太宗武烈王陵碑)’이다. 약칭 ‘무열왕릉비’라고 하며 신라시대 중기(7세기)에 건립되었다. 비문은 김인문(金仁問)이 썼다고 하나 정확한 자료는 남아 있지 않으며 현재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에 있다.
11) 유인원비(劉仁願碑): 정식 명칭은 ‘당유인원기공비(唐劉仁願紀功碑)’이다. 당나라 장군인 유인원이 백제를 멸망시킨 후 군대를 거느리고 사비에 주둔하면서 백제의 저항 세력을 제압한 과정이 담겨 있다. 평백제비(平百濟碑)와 함께 백제 시대를 대표하는 고비(古碑)로, 663년(신라 문무왕 3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부여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12) 신라의 ~ 왔거니: “신라의 한 본(本)이 대양 동쪽에서 왔거니, 일찍이 만 리 바람에 띄운 돛 비추었네. 고목 향기 속 구름과 태양 빛, 부상(扶桑, 전설 속 동해에 자란다는 나무)에 긴 활 걸친 모습 떠오르네(新羅一本大洋東, 曾照揚帆萬里風. 古木香中雲日色, 扶桑想像桂長弓).”(『복초재시집』 권20 「제진사명 육수)」 중 제4수)
13) 이 서신은 김정희가 옹방강의 아들 옹수곤(翁樹崐, 1786~1815)에게 보낸 편지로 보인다. 옹수곤은 김정희와 동갑으로, 매우 절친하게 지내며 많은 자료를 서로 주고받았으며, 관련 자료가 추사박물관 등에 다수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