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암 감세황(豹菴 姜世晃 1713-1791)
조선 후기의 소북계 문신, 서화가. 본관은 진주이며 자는 광지(光之), 호는 표암 외에 첨재(忝齋), 표옹(豹翁), 노죽(露竹), 산향재(山響齋), 홍엽상사(紅葉尙書) 등을 썼다.
영의정을 지낸 부친 강현의 막내로 태어났다. 아들 강이오와 손자 강진이 그림으로 이름났다.
소북의 정계 퇴출로 가세가 기울어 32살 이후에 처가인 안산에 기거하며 남인계 문인과 교류했다. 61살에 음사로 벼슬에 나간 뒤 66살에 문신정시에 장원급제했다. 병조참의, 한성부판윤을 거쳤다.
글씨, 그림, 문장이 뛰어나 시서화 삼절로 불린다. 글씨는 집안 모두가 뛰어나 어릴 때부터 잘 썼다. 10살 무렵 윤순에게 칭찬을 들었으며 12,3살 때 행서를 쓰자 주변에서 구해 병풍으로 꾸몄다는 일화가 있다.
강세황은 스스로 ‘이왕(왕희지, 왕헌지)을 본받고 미불과 조맹부를 섞어서 배웠다’고 했다.
이규상은 『병세재언록』에서 ‘해서와 초서는 시원하고 그윽하여 바라보면 마치 미인의 아름다운 모습과 같다. 팔분서도 자연스럽고 유려하고 질탕하며 초서는 경향(京鄕)에 두루 퍼져 귀천을 막론하고 벽에 걸 정도였다’고 했다.
중국서예가 유용과 옹방강도 ‘천골이 활짝 폈다(天骨開張)’라고 평했다. 1784년 연행부사로 북경에 가 알현한 건륭제도 ‘미불 아래이고 동기창 위’라고 칭찬했다.
[자료 1] 1784년10월의 서간: 30x45cm(서울옥션 제공)
省式 在松營付送一疏 兹於撥上得接十五日出手疏 憑審冬寒孝履支保 稍慰遠別之懷(…)
인사 말씀은 생략합니다. 송도(松都, 개성) 감영에서 편지를 보내드렸었는데, 이번 파발을 통해 15일에 손수 쓰신 편지를 받아보았습니다. 겨울 추위에 부모님 모시고 잘 지내신다하니 멀리 떨어져있는 이의 마음을 위로해주었습니다.(부분)
(해석: 김규선 선문대교수)
[자료 2] 명 진시교(陳詩敎)시 「화리활(花里活)」: 51.5x33.5cm(서울옥션 제공)
張牧之隱于竹溪 不與世接 客來蔽竹窺之 或韻佳人 呼船載之 或自刺舟餘語 俗子十反不一見 怒罵不顧也.장목지는 죽계에 은거하며 세상 사람들을 만나지 앉았다. 손님이 찾아오면 대나무로 가린 채 엿보아운치가 있는 사람이면 불러서 배를 함께 타거나 또는 스스로 배를 저어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세속적인 사람은 열 번을 찾아와도 한번을 보지 않은 채 노여워하고 욕하며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해석: 김규선 선문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