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 1705-1777)
조선후기의 소론 문인. 본관은 전주이며 자는 도보(道甫)이다. 호는 원교 외에 수북(壽北)도 썼다. 대대로 판서 이상을 지낸 명문가 출신으로 부친 이진검(李眞儉)도 예조판서를 지냈다. 『연려실기술』을 지은 이긍익은 장남이다.
영조 등극으로 소론이 실각하게 돼 벼슬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1755년(51살) 소론 역모사건에 연좌돼 함경도 부령(富寧)에 유배됐다. 1762년(58살)에 다시 전남 신지도로 유배된 뒤 끝내 해배되지 않고 현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조선후기 대컬렉터인 상고당 김광수(尙古堂 金光遂 1699-177)과 절친했다. 정제두에게 양명학을 배웠으며 그림과 글씨를 잘 했다. 그림은 산수, 인물, 초충에 두루 능했다.
글씨는 소론계 문신이자 정제두 제자인 윤순 문하에서 배웠다. 이후 자신의 서체인 원교체를 이룩하며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서예이론을 밝힌 「원교서결(圓嶠書訣)」을 남겼다.
『병세재언록』에서 이규상은 윤순(호 백하)과 비교해 이렇게 말했다.
‘윤백하는 전적으로 구결을 위주로 하고 이광사는 전적으로 획을 위주로 하였다. (...) 윤백하의 글씨는 자태가 좋고 이광사의 글씨는 기세가 좋다. 윤백하는 이왕(왕희지, 왕헌지)을 꼭 닮았으며 이광사는 『난정첩』『성교서』를 근본으로 하면서 소동파와 미남궁(남궁은 미불)을 배합했다.’
[자료 1] 서간: 30.5x34cm 1738년(서울옥션제공, 위창 오세창 구장)
인편을 통해 보내신 편지를 받고 섣달 추위에 정사하며 지내시는 몸 편안하다 하시니 적이 위안이 됩니다. 시생은 옛 모습 그런대로 보존하고 있으며, 그 밖에 드릴만한 말씀이 뭐 더 있겠습니까.(부분)
[자료 2] 해서 암거: 30x190cm(서울옥션 제공, 위창 오세창 구장)
巖居川觀草衣木食.
굴속에 살며 시냇물을 바라보고 풀 옷 입고 나무 열매를 먹다.
[자료 3] 당시 5수: 30x87cm(서울옥션 제공)
松葉堪爲酒
春來釀幾多
不辭山路遠
踏雪夜相過
솔잎은 술 담기에 알맞거니
봄이 오면 얼마나 담을까
산 길 먼 것을 마다하지 않고,
눈 길 밟으며 한 밤에 찾아가네.
(이상 번역: 김규선 선문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