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
조선후기의 문인으로 노론. 본관은 은진으로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이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아버지는 사옹원봉사 감조로 8살 무렵 친척인 송준길의 집에서 함께 공부했다. 이후 연산의 김장생(金長生)에게 수학했고 1631년 김장생 타계 이후에는 아들 김집(金集)에게 배웠다.
1633년(27살) 생원시에 장원 급제하면서 학문적 명성이 알려졌고 1635년 봉림대군의 사부로 임명됐다. 병자호란이후 재야에 은둔하다 1658년 효종의 부탁으로 관직에 나가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에 올랐다.
1683년 제자 윤증과의 불화로 노수분당이 일어났으며 1689년 숙의 장씨의 아들(나중에 경종) 세자책봉 반대로 유배되고 서울로 압송도중 정읍에서 사사되었다.
글씨는 처음에 안진경체를 익히다 주자를 모방했다. 힘차고 개성적인 서체에 더해 덕망과 학계의 영향력으로 글씨 주문이 많았다. 동춘당 송준길과 함께 양송체로 불린다.
대자로 전남 장성의 곽연루(廓然樓) 편액, 대전의 동춘당(同春堂) 편액 등이 있다.
[자료 1]
서간 1: 22x43.5cm 1681년8월5일자(서울옥션 제공)
가족에 대한 내용이 주인 편지로 두 아들이 서울에 갔는지, 관직을 얻은 아들의 잔치 채비에 대한 걱정 그리고 시험에 쓸 종이는 서울로 곧바로 부칠 것 등을 적고 있다.
(해제: 김규선 선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