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평산으로 자는 경숙(敬叔), 호는 상촌 외에 현헌(玄軒), 현옹(玄翁), 방옹(放翁)을 썼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은진 송씨 외가에서 자라며 외조부 송기수에게 수학했다. 20살에 진사시와 생원시에 잇달아 합격하고 이듬해인 21살에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임진왜란때에는 정철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였다. 아들 신익성(申翊聖 1588-1644)이 선조의 딸 정숙옹주와 결혼해 동부승지에 올랐다. 이어 자헌대부, 예조판서를 역임했다.
문장에 뛰어나고 해박해 이항복, 이수광 등과 교유했으며 이정귀, 장유, 이식과 함께 조선중기 4대 문장가로 손꼽힌다.
글씨도 잘 써 선조의 명을 받아 영창대군 신도비, 김제남 신도비를 썼다.
김상헌에 의하면 ‘서법에 힘이 있고 아름다웠으나 사람들을 위해 붓을 잡은 적이 한 번도없어 사람들의 그의 간찰을 얻기라도 하면 대부분 간직하여 보재로 여겼다’고 했다.
[자료 1]
서간: 25x26cm(서울옥션 제공)
해제
卽承令書 仰慰 山人法深者 以住持下去 故憑附起居 所願則完垣也 謹上狀 九月卄二 弟 欽
지금 보내신 편지를 받으니 삼가 위안이 됩니다. 법심(法深)이라는 산인(山人)이 주지로 내려간다고 해서 안부의 글을 보냅니다. 바라는 건 집안 두루 편안하시는 겁니다. 삼가 글을 올립니다. 9월 20일 아우 흠.
(번역: 김규선 선문대 교수)